성공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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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라는 명칭은 '하나이요, 거룩하고(聖), 공번되고( 公), 사도적인 교회'라는 교회에 관한 신앙고백 가운데 성(聖)과 공(公) 두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 밖에 영국 국교회, 영국 성공회, 앵글리컨 처치(Anglican Church)라고 하며, 미국의 성공회는 '주교 감독제 교회'라는 의미의 에피스코팔(Episcaopal Church) 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근세 영국의 해외 진출에 따라 성공회는 전세계로 확대되었으며 세계 성공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교회를 일컫고 있습니다. 세계 성공회는 중앙헌법이나 연방적 통치 체제를 갖지 않으며 나라마다 독립된 관구나 관구군을 갖고 독립적인 헌장과 교회법 체계를 갖추어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규모가 적어 독립관구가 되지 못하는 일부지역은 켄터베리관구로 포함됩니다.

성공회는 세계 160여개국에 약 7000만명의 신자가 있으며, 38개 관구와 500여개의 교구가 서로 일치를 이루며 유기적 협조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성공회(聖公會)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부패해가며 "왕중의 왕"으로서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자 루터, 위클리프, 칼빈 등 종교 개혁가들은 부패한 로마 교황에 대항해서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인 교회체제를 부정하고 "오직 성서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총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교회의 개혁을 시작 했습니다.
이즈음 영국에서도 교황이 부과하는 과중한 세금과 지나친 간섭, 성직자들의 권위가 신비에의 지나친 의존 등으로 인한 신앙의 정체등을 타파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기운이 일어나며 로마 교황과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의 희생속에서 "새로운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헨리8세의 이야기도 로마로부터 영국이 독립하기 위한 계기였고 새로운 교회가 태동되는 복잡한 과정 중의 일부 입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신앙 선조들의 사려깊은 고민 끝에 16세기에 이르러서 지금의 성공회가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성공회가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갖추면서 영국의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몇 가지의 특정적인 모습들이 교회의 요소들로 자리잡게 외었습니다

당시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로마카톨릭의 요소가 배제되고 민주적이고 이성적인 전통, 높은 도독적 품성을 요구하는 사상과 철학을 받아들였고

전통과 기본적인 권위(교회질서)마저 무시하는 개신교적 요소도 배제되었습니다 . 또한 방언만 있고 예언은 없는 교회의 모습도 배제되었습니다.

사도시대로 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질서(주교제를 비롯한 삼품성직)와 교부들의 신앙고백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의 예전을 보다 합리적이고 아름답게 그리고 성직자와 회중이 함께하는 예전으로 개혁했습니다.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이 주장한 성서, 은총, 말씀의 요소들을 수용해서 예전 중에 성서를 가장 많이 읽는 교회가 되었고 말씀과 성예전이 조화를 이루는 예전을 이룩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카톨릭적인 요소와 개신교적 요소의 장점들이 민족주의적 요소와 결합된 교회가 성공회입니다. 합리적이고 거룩한 교회를 이룩한 성공회는 세계의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일치의 모델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카톨리코스라는 희랍어와 가톨리쿠스라는 라틴어에서 나온것으로 "전체", "보편적인"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신경의 거룩한 공회라는 말에 이 "가톨릭"의 의미가 들어가 있습니다.

콘스탄틴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자 가톨릭 교회는 "황제의 교회"가 되고 황제가 인정하지 않는 교회는 비합법이라는 이해가 대두되었습니다. 5세기에 들어서 황제의 교회(가톨릭)가 전 세계의 교회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동서로 갈라지고 종교개혁으로 로마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개혁 교회들은 정통 로마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가톨릭이라 할 수 없다는 로마쪽의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는 다분히 정치적인 구분으로 절대적인 구분이 되지 못합니다.

성공회의 시각에서 볼때 로마 교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성공회는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리와 전통을 지키는 사도적 교회인가 아닌가를 중요하게 여기며 사도신경을 외우고 하느님의 백성을 보살피며 복음을 선포하는 로마교회, 정교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등 여러교회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보편적인 교회가 있다고 믿습니다.

가톨릭 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만을 의미한다면 성공회는 가톨릭 교회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원래의 정신을 기준으로 하면 성공회도 가톨릭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성공회는 사도 때부터의 교리와 전통, 혹은 성서와 전통과 이성을 바탕으로 항상 개혁해 나가는 교회로 흑,백 논리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성공회는 가톨릭이면서 동시에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하는 가톨릭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는 프로테스탄트의 번역입니다. 미국 성공회는 초기에 프로테스탄트의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점차 빠졌으며, 영국의 국왕은 프로테스탄트여야 한다는 불문율은 있지만 잉글랜드 교회 문서 어디에도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개신교의 중요한 특징은
1. 성서가 교리의 기본입니다.
2.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3. 세례와 성찬 두가지만 성사로 인정합니다.
4. 모든 신도가 사제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느님께 접근함을 인정합니다.
5. 하느님의 주권은 절대적임을 인정합니다.

성공회 안에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충실하려는 사람들과 가톨릭 전통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공회는 "가톨릭 전통을 존중하는 개신교", "개혁하는 가톨릭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흑백논리로 본다면 정체성이 없거나 모순으로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치와 신학과 전통이 공존하는 성공회의 눈으로 보면 모순이 아닙니다. 오히려 차이를 강조하며 자신의 교파를 우월하다고 주장하여 하느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관용을 미덕으로 여기며 모든것을 무리하게 정의 내리지 않습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배타성을 강조하거나 교리로 인하여 사분오열 되어있는 이들보다는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회가 영국에서 시작된 관계로 성공회를 영국 성공회(국교회)로 잘못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성공회는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세계 각지의 성공회 공동체의 연합이며 영국 성공회도 이중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영국 성공회가 세계성공회를 대표하지 않으며 다른 성공회 공동체에 대해 명령을 내리거나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켄터베리 대주교는 세계 성공회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합니다.

성공회는 전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대표자들이 모여 결의문을 채택하고 그 내용은 전 세계 성공회에 권고되지만 구속력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전세계 1억에 가까운 성도의 교세를 가진 교단이 어떠한 강제적인 구속력 없이도 문화와 지역적 차이를 넘어서 신앙적인 일치와 교류를 가질 수 있는것은 신앙의 사랑과 관용이며 성공회의 대표적인 매력입니다.

지금도 성공회는 선교지역의 토착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역별로 신앙과 문화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공회가 소개된 것은 중국에서 파송된 중국인 전도사 두명이 김해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일대에서 교리와 신앙을 전파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당시 노력의 결과로 영국성공회에 의하여 한국선교가 결정되고 1889년 11월 1일 영국런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조선 교구의 첫 교구장으로서 고요한 주교(Charles John Corfe)가 주교 서품을 받고 동역자들과 함께 1890년 9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하면서 한국 선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이 땅에 첫발을 디딘 선교사들은 의료선교를 시작으로 서울에 성베드로 병원과 성마태 병원, 인천최초의 양의 병원인 성누가 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아원을 1893년 서울 정동에 설립하는 한편, 선교활동을 위한 성경의 번역과 출판은 물론 신앙서적을 발간하는 문서선교를 전개하였습니다.

강화와 수원 진천 등지에 진명학교 또는 신명학교로불리워지는 초등학교를 설립, 1914년에는 성직자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성미가엘신학원(현재 성 공회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수도회로서 성가수녀회는 1925년에 설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1900년에 본격적으로 건축한 강화읍 성당은 전통적인 한국의 사찰형식을 빌어온 최초의 토착화 성당이었으며 이러한 한국건축양식의 교회로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성당은 강화온수리, 청주, 진천 등 여러 곳이 있습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성공회가 처음부터 지켜왔던 토착화 신학의 표현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에는 병천을 비롯한 각지역에서 성공회의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는 일제에 의하여 모든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을 당하는 비극과 함께 성미가엘신학원이 강제 폐교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에도 이러한 어려움은 계속되었고 6.25동란을 겪으면서 6명의 성직자와 수 도자가 공산군에 의하여 희생되는 가운데 경제적인 고난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후 1956년에 대한성공회는 새로운 교구장으로 김요한(John Daly)주교를 맞이하면서 새로 운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영등포와 강원도 황지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봉사, 상담, 복지, 교육사업 등의 선교활동을 펴서 산업선교의 효시를 이루었습니다.

둘째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가입하여 일찍이 벌려왔던 교회일치운동에 기구적인 참여를 하게 되 었으며,

셋째로 전후의 어려운 사회상황에서 기아해방운동을 벌려 자활마을의 개척과 음성 나환자의 정착촌을 세우는 등 사회복지활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벌렸습니다.

이러한 대한성공회는 1965년에 새로운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울과 대전으로 교구를 분할하고 최초의 대한인 서울교구장으로 이천환주교를 선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한국인의 지도력 아래 한국의 교회로 새롭게 재편되는 계기를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74년에는 부산교구를 신설하여 세계성공회 안에서 하나의 독립된 교회로 공인되는 발판을 만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의 대한성공회는 반유신을 비롯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선교와 함께 장애인을 위한 성베드로학교를 개설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려 나갔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인권회복을 위한 집회와 다양한 민주화 프로그램의 중심이 되어 온바 있는 서울대성당은 특히 우리나라 민주화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1987년의 6.10민주화항쟁의 시발지가 되어 전국으 로 확대되어 갔으며 에큐메니칼 운동의 거룩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1980년대에 주 목할 만한 일로서 성공회가 벌려온 바 있는 "나눔 운동"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빈민선교나 도시선교와는 달리 스스로 마을 공동체를 조직하고 자활사업체를 조합형식으 로 만들어가며 교회를 통하여 서로 가진것을 나누면서 미래를 열어가는 선교활동입니다. 성공회는 현재 전국에 7개의 "나눔의 집"을 운영하면서 선교와 생활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 습니다.


오늘날 대한성공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교회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 을 감당해 왔습니다. 우리는 다만 기구적인 일치를 도모하려는 것보다는 선교적 협력과 일 치를 이루어 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한국천주교나 한국정교회와도 별도의 대화와 협력관계를 지속해 왔습니다.

이와 함께 학생선교를 위하여 한국 기독학생총 연맹에 참여하고 있으며 청년선교를 위하여 YMCA와 YWCA에 참여하고 있으며 교육활 동을 위하여는 연세대학교 이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며, 성공회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선교연합기구인 기독교방송,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서회 등에 이사를 파송하여 방송선교와 성서의 반포 그리고 문서연합선교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런 점에서 볼때 대한성공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에쿠메니칼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는 교회의 하나로서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열린 교회"이며 정직하고 정의로운 미래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대한성공회는 아직도 수적으로 참 미약합니다. 6.25전쟁 이전까지 북한에 있던 많은 교회를 잃은데다가 일찍이 너무나 엄격한 성직자양성 프로그램으로 인하여 충분한 성직자를 길러내 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세계 162개국에 퍼져 있는 약 1억의 성공회 신자들 과 교류하면서 이 땅에 참사랑과 진리가 이루어지는 세계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는 열 사람의 의인을 만들어 내고 마침내 교회가 하나가 될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전국에 100여교회, 약 5만명의 신자가 있으며, 3개 교구는 각교구를 중심 으로 교회발전과 사회복음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1990년 9월 29일, 대한성공회는 선교 100주년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 겨레의 생명"이라는 주제 아래 겨레에게 생명을 전하고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하여 일하는 교회가 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1992년 9월 29일 관구헌장 선포식을 갖고 1993년 4월 16일 초대관구장 취임식과 함께 독립 관구로 승격하면서 겨레에서 생명을 주고, 민족과 함께 하는 새 시대의 교회로 거듭나게 된 대한성공회는 2천년대의 마지막 10년을 '복음화 10년'(Decade of Evangelism)기간으로 정하 고 새 시대를 주님께 봉헌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기 위하여 힘차게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