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및 모임안내
일정 및 행사표
설교 말씀
생활과 묵상



연중 29주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

작성일 : 2017-10-21       클릭 : 168     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첨부파일

오늘 복음성경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는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나오게 된 배경과 과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사제,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원로들을 중심으로 한 유다의 최고 의결기구라고 할 수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는 그들의 전통과 권위, 그리고 그들의 이데올르기인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예수를 없애버리려는 음모를 일찍부터 꾸미고 있었던 배경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래, 대놓고 예루살렘 체제의 지도부를 향해 이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결국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마태 12:34),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마태 23:33)는 등 온갖 저주를 퍼붓는가 하면, 그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는 성전정화사건을 벌이면서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에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와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읍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23:16) "너희 같은 눈먼 인도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하니 말씀하셨고 (마태 26:61) "이 사람이 하느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읍니다" 하고 증언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과 행동은 예루살렘의 성전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부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도전을 받고서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없앨 방도를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당장에 신성모독죄라도 걸어서 처형하고 싶었지만, 수많은 민중들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예수님을 체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위기 모면용의 지혜로운 말이 아닙니다. 양쪽을 다 인정해서 위기를 넘기고자 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로마정부의 요구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도 따르면서 그 사이를 적당히 오가며 살려는 카르사이와 하느님 사이를 적당히 오가며, 다 같이 섬기는 이중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민중들에게 "두 주인을 섬기지말라"(마태6:24)고 언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카이사르와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불의와 정의를, 악과 선을, 비인간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동시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당 사람들과 맞서고 있습니다. 이들은 좋든 싫든 로마의 통치 권력을 인정하고 따르는 부류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겉보기에 카이사르의 것을 인정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에 의하면 로마의 통치권력을 승인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들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카이사르의 것에 집착하고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것이 가장 우선이라는 인식과 각오를 촉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중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이미 카이사르 편에 선 사람들, 하느님 편에 서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대중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대중들은 로마의 권력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탄압하고 당시 인두세를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 대한 억울한 세금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떤 말을 했다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사 민중들이 '카이사르의 것''하느님의 것'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양자택일의 결단을 명령, 촉구하는 메시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편, 그것은 소외되고 있었던 사람들의 편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병든사람들 탄압을 받던 대중과 함께 하다가, 유다 체제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이란 바로 사랑” “희생” “헌신이였기 때문입니다.

 

                                                          이태용 神父 설교 중에서


덧글쓰기  

광고성 글이나, 허위사실 유포, 비방글은 사전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연중 30주일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 관리자 10-27 110
다음글 연중 28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 관리자 10-13 410


 

교회소개 | 오시는길 | 개인정보 보호정책 | 이용안내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일산교회    관할사제 : 김병내   주소 :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경의로 371 (우)410-812    개인정보관리책임 : 김병내
전화 : 031-907-6004    팩스 : --    메일 :    사이트의 모든 권리는 일산교회 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