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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연중 20주 이경호(베드로)주교 설교 1

작성일 : 2019-08-16       클릭 : 229     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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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성숙한 믿음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 1

 

우리들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람은 기질이나 성향 그리고 일하는 방식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사람의 성격이나 유형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것 가운데는 MBTI와 에니어그램이 있습니다. MBTI는 사람의 성격유형을 16개의 유형으로 구분하는데

에너지, 힘을 사용하는 방향에 따라서 외향형이냐 내향형이냐,

인식의 기능에 따라서 감각형이나 직관형이냐,

판단 기능에 따라서 사고형이나 감정형이냐,

어떤 일을 수행하는 방식에 따서 판단형이냐 인식형이냐로 구분됩니다.

에니어그램에 따르면 사람은 크게는 머리형 가슴형 장형 세 개로 구분하지만 다시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9개의 유형으로 세분화 됩니다.

이런 성격 유형 검사를 해 보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사람은 크게 끊임없이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인가? 아니면 서로 화목하고 평화롭게 지내길 원하는 사람인가?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요? 불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인가요?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온전한 일치를 이루신 분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이 가득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가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살피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권력이나 힘으로 지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몸소 겸손하게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들이 믿는 주님의 모습이고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주님은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니요.” 무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불은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없애 버립니다. 지난 봄 속초에서 산불이 났을 때 불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우리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229절에는 하느님은 태워버리시는 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도 내 말은 정녕 불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도 부순다. 고 선언합니다. 이렇듯 불은 신앙적으로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고, 정화시키는 이미지입니다.

 

우리들은 성령의 불로 우리의 옛 자아 옛 성품을 죽이고 새로운 자아, 새로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세례를 받을 때 세 가지 서약을 했습니다.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첫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탄의 모든 일, 세상을 타락시키는 모든 악한 세력과 죄악, 그리고 모든 욕망을 거절하며 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두 번째는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내용을 믿으며 살겠노라고 서약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된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행할 것들을 지키며 살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겠다. 주님의 교회를 온전히 섬기며 살겠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말과 행실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약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감자, 고구마 그리고 옥수수를 좋아하시는지요?

이런 것들은 잘 익혀야 맛이 있습니다. 매실이나 포도주와 같은 발효 식품 역시 잘 숙성되어 발효가 되어야 맛도 있고 향도 좋습니다.

김치를 담글 때 배추나 무를 소금에 절입니다. 잘 절여야만 맛있는 김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햇수만 길고 신앙이 성숙하지 않으면 공동체 안에서 늘 분열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우리들의 옛 자아와 성품이 하느님의 말씀 사랑,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푹 절여서 죽어야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 안에는 죽은 척만 하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내적인 치유와 회복의 경험을 하지 못한 분들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더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관대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하는데 오히려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더 완고하며, 더 유치한 말과 행동으로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령체험이나 부활체험은 이상한 신비 체험이 아닙니다.

내적인 자아가 죽는 경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 안에서 이기적인 자아가 죽어야 새로 태어납니다.

나의 옛 자아가 성령의 불로 정화되어야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받을 수 있고, 새로운 믿음의 길을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의 길을 가려고 할 때 처음에는 거짓된 자아와 참 자아 사이에 분열의 아픔이 있고, 갈라섬의 상처가 있지만 결국에는 그런 아픔의 과정을 견디어야 더 성숙하고 온전한 사랑을 누리며 하느님 안에서 일치와 평화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믿음의 길을 걸어간 신앙인은 철저한 회심을 통해서 기존의 질서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로, 토마스 아퀴나스, 아씨스의 프란시스가 그랬습니다.

이 모든 신앙인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 세속적인 기준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원하는 삶과 하느님이 원하는 삶 사이에서 고민했고 갈등했지만 결국은 하느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고, 하느님의 부름에 응답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시대의 뜻과 징조를 분별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지금 우리들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평화와 행복은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어떤 미래와 희망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시대의 징조와 뜻을 볼 줄 아는 맑은 눈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히브리서는 바로 이런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믿음은 새로운 눈, 좋은 관점을 갖는 일입니다. 신령한 눈 맑은 눈을 갖는 일입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눈이 맑아야 마음도 맑습니다. 이 눈과 마음이 일치를 이루어야 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 두 눈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눈과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면 우리의 믿음은 늘 갈등하고 방황합니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들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도 하느님의 뜻과 징조를 발견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눈으로 이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의 잣대로 교회의 믿음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주장을 할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세상의 언론 매체가 주장하는 논리인가? 아니면 성서와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인가? 살펴야 합니다.

 

두 번째 믿음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입니다.

한 생명의 탄생이나 성장에는 반드시 산고의 고통이나 아픔이 있습니다.

그 산고의 고통을 견디어 낸 사람만이 생명의 소중함을 압니다.

이처럼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힘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정의를 실천하였고, 약속해 주신 것을 받았으며, 고난과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들도 믿음의 힘으로 이겨내고 견디어 내야 할 것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믿음은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생명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삶입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을 갑니다. 물론 스스로 가난과 청빈의 삶을 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불의와 맞서 싸우면서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삶을 살지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니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닮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더 값있고 보람 있는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삶이 바로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이 가신 길이고 참 생명이기 때문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1-2절을 다시 읽어 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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