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하느님)의 기준
복음성경을 통해서 ‘포도원의 일꾼과 품삯’으로 아침 일찍, 아홉시, 열두시와 오후 네시, 그리고 오후 다섯시에 선택을 받은 일꾼의 비유입니다. 성경 전체의 초점은 하느님께 일꾼으로 선택된 특권을 받았지만 불평과 불만을 가진 자들에게 하느님의 기준을 보여 주십니다. 세상의 이치로 보면 "어떻게 아침 일찍 일하러 온 사람과 저녁때 와서 잠깐 일한 사람의 품삯을 같게 줄 수 있느냐?" 이것은 공평하지 않은 주인의 처사이고 포도원 주인을 주님이라 칭한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주인의 처사는 불공평하게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속의 포도원 주인은 일을 시켜 이윤을 남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땐 다소 오해가 풀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포도원 주인은 일꾼에게 일을 시켜 이익을 챙기는 세상의 일반적인 주인이 아니라 마치 품꾼들에게 일방적으로 일당을 분배하는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길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는 사람들을 찾아 일거리를 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일을 시켜 돈을 준다는 목적 보다는 품꾼들에게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는 모습에 더 가깝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일을 한만큼 삯을 지불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주인 앞에선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14-15절) 하면서 동일한 액수를 주는 것이 주인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일을 누구 보다 더 했다고 돈을 더 달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2절에 보면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했기 때문에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 것은 이미 일하기 전에 언급이 된 사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액수의 돈을 주었을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이 주인은 일꾼을 불러 부려먹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일꾼들을 긍휼히 여기는 주인의 일방적인 은혜와 자비가 목적임을 우리는 찾을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늦은 저녁시간에도 일거리를 못 찾고 헤매는 이들에게 향한 따뜻한 주인의 자비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같은 품삯"의 이유는 주인의 "은혜"에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상황에서 늦게 와서 횡재한 듯 보이는 사람을 기준으로 비교하면서 이 문제를 접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 와서 더 많이 일한 댓가와 상대적으로 적게 일한 사람의 댓가를 같이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늦은 사람의 횡재가 아닌 주인의 자비로 인식한다면 이것은 "불공평"이 아니라 "자비"를 베푼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찍 온 사람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뒤에 온 사람에게 은혜가 내려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일 한 만큼 혜택을 얻는 것에 더 많이 익숙합니다. 안하거나 덜 하면 못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도 이러한 세상의 기준이 많이 존재합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기준을 정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하느님이신 것을 착각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늦게 온 사람은 얼마나 그 마음이 간절했겠는가?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남들보다 늦게 왔으므로 죽을힘을 다해 남은 시간을 일했을 것인데 말입니다." 십자가상의 한 강도는 평생 죄만 짓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와 눈이 마주쳐 죄를 고백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불공평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생 예수님을 믿으며 신앙생활 열심히 해야 구원받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피땀 흘려 기도하는 예수님을 등진 채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는 싸움을 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데나리온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을 더 했건 기도를 더 했건 헌금을 더 냈건 모두 한 데나리온 밖에는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공로는 하느님의 은혜 앞에 절대로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왜 하느님은 구원을 "은혜"로만 주셨는가? 우리로 하여금 그 구원을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난 9월 초에 서울 강서구에서 장애우를 둔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장애인 학교를 지역에 세우려 하는데 지역 주민들과 비장애인 학부모들이 장애인학교가 들어서면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는 주장 이였습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의 기준은 다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15-16) 이태용 神父 설교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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