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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12주일 "그 존재와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루가 8:39)

작성일 : 2019-06-29       클릭 : 33     추천 : 0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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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존재와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루가 8:39) 

 

김은경 드보라 사제 

 

1. 오늘 에텔드리다 성인 축일을 맞으신 에텔드리다 교우님들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일평생 힘이 되어주시고 붙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올해는 한국 전쟁 발발 69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성공회 역사 속에서는 한국전쟁 중에도 지역 교회들을 순방하며 신자들을 돌보고, 납북되셨다가 살아돌아오셔서 불사조라는 별명을 가지신 구세실 주교님이 계십니다. 그 외에도 여러 신앙의 선조들이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이번주차 성공회 신문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와 생명의 존엄함이 우리사회와 동북아시아에 깊이 뿌리내리기를 소망합니다.

기독교 인간론에 따르면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자체로 존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을 쉽게 도구화하며 그 존엄성을 부정하라고 유혹합니다. 최근에도 타인의 존엄성을 부정하여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유린하고 물건처럼 취급하여 거래 수단으로 삼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설립된 사법기관들이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과 결탁하여 악행을 눈감아주거나 악행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하소연은 못들은 채했던 일까지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성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는 하느님의 창조원리에 반하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의 지배를 결박하여 무력화시키고,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존엄한 존재라는 걸 선포하며, 존엄한 존재로 살아가야 할 사명을 맡고있습니다. 
2. 우리가 오늘 읽은 성서말씀들은 다른 무엇보다 '사명'이 사람을 사람되게 한다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1독서 열왕기상 말씀에서는 하느님께 사명을 받은 사람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루가복음서는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가복음 8장을 '군대마귀' 들린 사람의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완전히 망각한 사람을 대표해서 '군대마귀’ 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게르게사 지방에 도착하시자마자 ‘군대마귀’ 들린 사람과 마주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자마자 그 사람 속에 있는 마귀를 물리치는 구마기적을 펼치셨습니다. 

게르게사 지방은 요르단 강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방인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곳은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물리치셨을 때, 그 마귀들은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밝혔습니다. “군대”는 로마 군인 육천 명 정도의 규모를 가리키는 단위인 레기온을 번역한 말입니다. 

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갈릴래아 예수」라는 책에서 군대마귀 들린 사람이 당시 유다민중을 상징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수탈당하던 로마제국의 군사권력으로부터 압제받던 민중들을 해방시켰던 사건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당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유다 민중들은 로마제국과 부패한 유다의 정치 지도자 및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삼중의 수탈을 받고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제정신을 갖고 살기 어려울 만큼 각박한 상황 속에서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제정신을 갖고 살기도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 역시 그 시대 사람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건 서글픈 일입니다. 

예수께서 로마군대와 대결하셔서 물리치신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었는지, 아니면 당시 유다민중들이 그러한 소망을 갖고 있어서 그 소망을 반영하여 구상한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고립되고 고통받는 한 사람을 만나시고 그를 고쳐주시고 마귀를 결박하셔서 물리쳐주셨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을 찾아가셔서 그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군대마귀'를 쫓아내 주심으로써 악의 지배를 결박하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이 본래는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임을 선포하시고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 사람에게서 사랑받기를 원하신다는 걸 확증하셨습니다. 

'군대마귀”들렸던 사람은 그렇게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관한 방향성도 찾았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할 지에 대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악의 권세에 눌려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악의 지배를 결박시킬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악의 지배를 무력하게 하시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이제는 이 이야기를 '군대마귀' 들렸던 사람의 이웃들의 관점 특별히 돼지떼 주인들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군대 마귀”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물리치셨을 때, “군대마귀”는 자신들을 지옥에 처넣지 말고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허락하시자 “군대 마귀”는 돼지떼 속에 들어갔고, 그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습니다. 마르코복음 5장에 이 이야기가 똑같이 나오는데 그 때 죽은 돼지떼가 이천 마리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돼지떼 주인들이자 “군대마귀”들렸던 사람의 이웃들은 자신들이 기르던 돼지떼가 죽은 것을 보더니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돼지떼 주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가까이 오신 일로 인해서 손해를 봤습니다.

한 사람을 살려내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 인해서 손해를 본 게르게사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자신들이 더 큰 손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웃이 온전해지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웃이 어떤 이유에서건 존엄성을 빼앗긴 채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드러나도록 그 일에 동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움을 받을 수도 있고 박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는 손해 볼 것과 억울한 일을 당하고 모욕 받을 수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차별하고 약탈하며, 불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게 관성이 돼 버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 하느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서 손해볼 줄 아는, 그래서 서로를 존엄하게 여기고, 살리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살림의 역사를 펼쳐나가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언약 백성입니다. 예수님이 손해보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을 몸소 보이셨고 우리는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만, 하느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도 다시 살리셔서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명의 삶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손해볼 줄 아는 덕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사명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라서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만이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4.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손해보고 희생하는 삶을 훈련하는 곳입니다. 교회에서도 손해보지 않고 희생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어떻게 손해보고 희생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조차 예수님을 따라서 자기를 비우는 실천을 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어디에서 하느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함께 이루고 있는 바로 이 곳 일산교회가 우리가 자기중심성에서 떠나서 하느님 중심으로 돌이켜야 하는 시작지점이며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 옆사람과 함께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지체를 살리는 사랑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힘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기뻐하기도 하지만, 서로 갈등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아픔이 지속되고 지치면 교회생활에 대해서 허무감에 빠지거나, 절망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고, 그 교회의 중심을 내가 차지하고 있을 때, 이런 무력감에 빠집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을 주인 삼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을 주인 삼는 새 사람을 입는 일입니다. 삶의 중심이 나에서 하느님으로 이동하는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분과 함께 사는 삶에서 손해를 볼지라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겠노라고 변화되는 겁니다. 

우리는 세례 받는 순간 우리의 삶의 중심이 나에서 하느님으로 옮겨지는 것을 경험했지만,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라고 요구하는 악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악은 우리 삶의 중심이 하느님이 아니라 나라고 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러한 악의 지배는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인정하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걸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5. 하느님을 존재와 삶의 중심에 둔 사람만이 손해볼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는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그 존재와 삶의 중심에 둔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의 중심이 바뀌는 겁니다. 

하느님이 자기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시고 성자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서 우리를 살리셨는데 하느님이 우리 존재가 사라지기를 바라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모시고 영원히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기에게만 몰두하고, 자기애로 가득차서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라고 유혹하는 악의 지배를 결박하고, 그 중심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옮기는 일을 지속해나가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홀로 동떨어져서는 나 자신이 얼마나 자기에게 몰두하는지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실상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교회를 이루고 살아갈 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자신이 얼마나 쉽게 악의 지배를 허용하는지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내 속에서 미움과 증오를 끄집어내주는 사람을 만날 때에 우리는 '아! 내가 아직 예수님을 닮으려면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구나'라고 알아차리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삶이 악의 지배를 결박시키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게 합니다.    

6. 1독서에서 엘리야는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 비로소 숨겨져 있던 자기중심성을 마주했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께 사명을 받아서 갈멜산 위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 850명과 대결하여, 하느님만이 참 신이심을 확증시켰습니다. 그렇게 큰 싸움에서 하느님이 승리하시는 걸 몸소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이 회개는커녕, 엘리야 자신마저 죽이려고 하자, 두려움과 깊은 절망에 빠져서, 이세벨을 피해서 도망쳤습니다. 

그때 그는 하느님께 차라리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고 탄원하며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살다가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를 만드시고 양육하시고 인도해주신 우리의 참 주님이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새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주야로 사십일을 걸어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하느님이 계신 거룩한 산, 호렙산에 도착했습니다. 

7. 호렙산에 이른 날 엘리야는 한 동굴 속에서 그 날 밤을 지냈는데 갑자기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야훼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세상의 시험 앞에서 자신이 왜 살아가고 있는지 잊은 채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엘리야에게 하느님은 엘리야가 누구이며 어떤 사명을 받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하느님을 생각하니 마음에 불이 붙는다고 했습니다. 화가 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제단을 허물고 그 예언자들을 모두 칼로 죽이고 이제 자신만 남았는데 그들이 자기마저 죽이려고 한다며 탄원했습니다. 이제 하나 남은 당신의 예언자인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실 거냐는 하소했습니다. 

8. 그때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지나가셨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나더니 산을 흔들고 바위를 산산조각 낼만큼 큰 바람이 지나갔는데 그 가운데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 지진이 일어났는데 하느님은 그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지만 그 불길 속에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엘리야는 목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서있을 때 다시 '엘리야야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이제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는 자신의 관점을 고집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무얼 하고 계신 거냐는 항변입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하느님께 소명을 받아서 사명의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맡은 사명이 하느님께 받은 사명이 아니라 나 자신이 시작한 일인 것처럼 착각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오늘날 지탄받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도 초기에는 매우 신실하고 겸손한 목회자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이고 권력이 생기면서 자만에 빠져서 결국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타락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뭐하고 계시느냐고 항변하는 엘리야의 모습에서 숨겨져있던 엘리야의 자기중심성이 발견됩니다. 만약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지 않았더라면, 엘리야는 이제까지 하느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자신이 잘나서 해온 줄로 착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9. 그때 하느님은 엘리야가 미처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 일 곧 하느님이 계획하시고 실행하고 계시던 일의 일부분을 엘리야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엘리야가 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악의 세력을 단칼에 쓸어버리는 강력한 힘을 쓰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미한 소리 가운데서 사람의 머리와 지식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경륜으로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소명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엘리야에게 아직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을 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이 있다는 걸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람들을 세워서 아합과 이세벨을 대신할 왕위를 준비하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예언자를 세우라는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그제서야 엘리야는 자기중심에서 생각하던 판단을 멈추고 하느님의 관점으로 자신과 일어난 일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을 회복하고 나서야 그는 다시금 하느님께 새로운 사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0.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엘리야에게 “네가 여기서 무얼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하느님이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 물음은 우리가 자기에게 몰두하라는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우리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이 주시는 사명을 받아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믿음의 자손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과 동행하며 성삼위일체가 참여하고 계시는 그 사랑에 참여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일부분이며 언약 백성의 구성원들입니다. 믿음의 자손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몰두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라는 악의 지배를 알아차리게 해줍니다. 

안셀름 그린이라는 가톨릭 영성가는 개인에게 몰두하는 것도 탐욕이라고 했습니다. 개인에게 몰두하는 것을 마치 영성이 깊어지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개인에게 몰두할 수록 자기중심성은 강화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지점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과 나 그 사이, 그리고 나와 이웃 그 사이입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관계적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볼 때에만 우리 자신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진실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볼 때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대마귀’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참 나인 자신을 되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진짜 나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자신을 되찾은 ‘군대마귀’ 들렸던 사람은 이제 예수님께 사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마을로 돌아가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겪은 일을 증거하라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서 자기중심성을 깨뜨릴 수 있었던 엘리야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잃었던 자신을 되찾았던 사람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세미한 음성을 귀 기울여서 듣고, 예수님을 만날 때, 우리가 누구인지 무얼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고 예수와 함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고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해있는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에 의한 상속자입니다.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살아가는 삶에서 떠나지 마시고 우리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느님이 맡겨주시는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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