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능동적인 청지기와 수동적인 청지기(가해 연중33주일)
작성일 : 2023-11-19       클릭 : 11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1119 가해 연중33주일

판관 4:2-7 / 1데살 5:1-11 / 마태 25:14-30

 

능동적인 청지기와 수동적인 청지기

 

세계의 주요종교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종말 혹은 말세를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를 비롯하여 유대교, 이슬람교 등 중동지방에서 발생한 유일신 종교는 창조에서부터 종말이라는 선명한 역사관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 인도에서 발생한 힌두교와 불교 등은 상대적으로 볼 때,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비해서 선명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말세를 이야기합니다. 이에 반해 유교는 위에 언급한 종교들과는 달리 주로 현세의 삶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유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왕조의 교체라던가 사회질서의 변동 등과 같은 이 세상의 사건을 지칭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종교학자들은 동아시아인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현세지향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양인이 되었건 동양인이 되었건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모든 것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모든 것이 끝난다는 종말이 언제 그리고 종말이 올 무렵의 전조현상은 무엇일까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과 같은 큰 종교에서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현상을 종말의 징조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사람들의 도덕이 타락하며, 악이 만연해지고, 믿는 사람들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징조들이 반드시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쩌면 그러한 징조가 없다가 갑자기 도둑처럼 그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서에서도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36, 44)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말, 우리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주님의 재림이 있기까지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떠나고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교회 공동체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서 세가지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마태 24:45-51)를 통하여 주인이 맡긴 임무(mission)에 충실해야 하고, 둘째는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비유(마태 25:1-13)를 통하여 여분의 기름까지 준비해야 하며, 셋째는 오늘 들은 복음인 달란트의 비유(25: 14-30)을 통하여 주인이 맡긴 재산을 배로 불리는 데 자신의 재능을 다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우리는 충실성, 준비성, 능동성이라는 이 세 가지 덕목을 배양해야 합니다.

이 세가지 덕목 중 오늘 복음에서 강조한 능동성에 대해서 성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대교인들이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는 <탈무드(Talmud)>는 유대인들의 율법과 관습, 사상, 삶의 지혜 등이 담긴 책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돈을 땅에 파묻는 행위는 도둑이 들 것을 대비한 가장 안전한 대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들의 관습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한 셈입니다. 이에 반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돈으로 재산을 불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이 지역에 통용된 로마법이 허용한 풍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주인이 재산을 불리기 위한 목적으로 종에게 돈을 맡기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방인들인 통치세력과 대부호들 그리고 금융계 인사들은 돈을 맡기고 여러가지 방식으로 이자를 받아 부()를 늘렸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이고 사상적인 배경을 갖고서 오늘 비유 이야기를 성찰하면서 저는 여러분께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느님과 인간 간의 관계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가지고 두 배로 돈을 번 종과는 달리,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받은 돈을 그대로 드립니다. 이에 대하여 주인은 앞의 두 종에게는 칭찬하며 더 큰 임무와 상을 내린 반면에, 마지막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 이야기의 앞부분을 보면,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돈을 맡겼지 이것을 가지고 돈을 더 벌라고 한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업이라는 적극적인 행동을 한 결과 돈을 벌었고, 한 사람은 탈무드의 가르침 대로 땅에 묻어 숨기는 소극적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들은 왜 이런 상반된 행동을 했을까요? 저는 그들이 주인에 대한 인식이 달랐던 것이 그 원인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한 말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마태 25:24)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주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롭게 시도하거나 도전하지 않고 현상유지라는 무사안일만 추구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설령 돈을 잃게 될 경우 주인한테 책망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겠지만, 반대로 이익을 창출할 경우 주인한테 더 많은 기회와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더 믿음을 두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용기를 갖게 했고, 결과적으로 주인과 자신 모두를 기쁘게 했습니다.

둘째, 삶에 대한 태도입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적극적인 태도로 세상을 개척해 갔는데 반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현상유지라는 소극적인 태도로 살아갔습니다.

세번째는 보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회과학에서는 오늘 복음 중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라는 말씀에 착안해서 사회적 불평등현상을 마태오 효과(Matthew impact)’라는 이론으로 설명하고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마태오 효과란 성공한 사람이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을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더 소외되는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마태오 효과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가르치는 궁극적 의미는 사회과학에서 말하는 마태오 효과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불평등이라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결과를 자초한 개인 혹은 집단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약하다’, ‘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또한 자신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과 교회 혹은 집단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참된 선물마저 잃게 될 거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제1독서에서 드보라(Deborah)는 여성이라는 시대적 제약을 뚫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 내었습니다. 만일 그녀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소극적이었다면 그녀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도 계속해서 이민족에게 시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녀의 충실성과 준비성과 능동성으로 인하여 주님께는 영광을, 그리고 그녀와 이스라엘에게는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드보라는 능동적인 청지기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청지기(steward)남의 것을 대신 맡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청지기란 단지 대신 맡아 지키고 관리하는 수동적인 태도로 머물지 않고 드보라처럼 그리고 오늘 복음에 등장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능동적인 사람을 뜻합니다.

이제 교회 달력으로 두 주만 있으면 한 해를 마감합니다. 어제는 서울교구 의회가 있었습니다. 한 해 활동을 보고하고 내년 교구 계획을 보고한 자리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가 주님이 맡겨 주신 것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청지기인지, 아니면 그저 현상유지만 하는 걸로 만족한 수동적인 청지기인지 반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맡겨 주신 임무를 수행할 때, 혼자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서로가 협력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카 교회 신자들에게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와주십시오(1데살 5:11)라고 권고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이 권고를 따라 우리들도 함께 상대의 달란트를 격려하고 도와주면서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예배를 마치고 우리는 마가 성전으로 옮겨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때에 주님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그 달란트를 잘 살려왔는지 반성해 보며, 그 달란트를 앞으로도 잘 개발할 수 있도록 간구합시다.

우리 모두에게 달란트를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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