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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삶”

작성일 : 2017-09-16       클릭 : 424     추천 : 0

작성자 원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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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삶

구본균 사무엘 신부 / 천안 봉명동 교회

가을의 높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계절입니다. 가을 하늘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고 싶지만 살다 보면 평화로울 때보다 참아내야 하거나 분을 삭여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뭔가 부당하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이해 못할 처사를 당한 경우들이지요. 그 때마다 우리는 '확실한 해결책'을 갖고 있습니다.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또는 '내가 용서하자!'고 되뇌며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내가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모든 상황을 용인하고 모든 사람을 용서한다고 해도, 그러한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그러한 일 때문에 몹시 괴로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용서해줘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예수님은 답합니다. '일곱'이라는 말이 사실은 이미 무한정을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인데 거기에 더하여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라고 한 것은 그 의미를 더더욱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용서라는 점에서는 주제가 일치하지만, 사실은 조금 더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종이 왕에게서 그 빚을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탕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비유의 기본 줄거리입니다. 1만 달란트 대 100데나리온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대게 1달란트는 노동자의 17년 품삯정도 된다고 하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라고 합니다. 사실 빚의 액수에 비유의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엄청난 금액의 차이는 왕으로부터 빚을 탕감 받은 종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가를 말해주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자기에게 빚진 사람에게는 털끝만큼도 베풀지 못하는 완악함을 대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대조에서 비유의 목적은 분명해집니다. 그렇게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는 말씀은 큰 뜻에서 보면 비슷한 의미일지 모르겠으나, 본래의 초점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으니 너희도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본래의 초점이었으나, “너희가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용서하지 않는다.”로 바뀌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베푸시는데 어째서 인간들은 그렇질 못할까?’하는 복음서 기자의 고뇌가 들어 있습니다. ‘좋은 일 하면 복 받는다는 교훈보다는 잘못하면 벌받는다는 교훈 아닌 경고가 더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에서 비롯된 고뇌인 것 입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정도다라는 가르침보다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윽박지르기가 훨씬 위력을 발휘합니다.

빚을 탕감할 수 있는 사람은 빚진 사람이 아니라 빚을 지운 사람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빚진 죄인 취급을 당하는 사람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뿐 사실상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람어로 ''''는 같은 말입니다. 문제는 ''에 의존하게 하는 관계, ''를 낳는 관계입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 불행한 관계를 들어내십니다. 억울함을 당한 사람에게 그 억울함을 참고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뜻이기보다는, 그렇게 사람들이 억울하게 되는 경우를 만들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큰 줄 알면 베풀 수 있을 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으로서의 용서와는 다릅니다. 그 어디에선가 소리 없이 참고 견디며 아파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무자비한 종은, 자기 잘난 것만 알았지 자신이 하느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배은망덕의 전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를 아는 삶, 그것이 인간의 바른 삶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안다면 자기 힘과 권한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것만 챙긴다고 아웅다웅할 일도 없습니다. 형제자매를 억울하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를 잊지 않는 삶, 그 삶으로 우리들 마음의 평안과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우리 공동체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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