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토마입장에서 부활 이해하기(다해 부활2주일)
작성일 : 2022-04-24       클릭 : 28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424 다해 부활2주일

사도 5:27-32 / 묵시 1:4-8 / 요한 20:19-31

 

 

토마입장에서 부활 이해하기

 

 

 

2017년 모() 조사전문기업이 전국 만19~59세 성인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사회적 자본 및 전문가 권위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신뢰도가 매우 낮은 불신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조사에서 특히 주목해 볼 점은 누군가를 신뢰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언행일치(74%)였습니다. 이러한 낮은 신뢰도는 비단 인간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부나 다른 세대, 언론,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아마도 사회의 한 일원인 교회 역시 이러한 세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위기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신문과 방송에서 알려주는 내용을 그대로 믿기 보다는 각종 SNS 등으로 다른 관점 혹은 심지어 팩트체크를 통해 보다 사건의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접하기도 합니다. 물론, 공영매체와 개인매체를 불문하고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가짜뉴스와 가짜정보 들이 난무해서 우리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도 있지만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흐름은 코로나 팬데믹과 세계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 그리고 각종 부패와 추문 등으로 정부를 비롯한 사회 각 영역을 이끌고 있는 이른바 지도층들에 대한 불신과 냉소가 점점 파괴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에 대하여 진실함과 투명함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습니다. 새로운 소식이라는 의미인 뉴스(news)는 더 이상 우리를 신선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짜증나게 하고 우리의 시선을 더 차갑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 이런 악순환의 늪에 빠진 걸까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중 토마 이야기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성찰할 수 있는 하나의 시각을 제시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는 그 자리에 있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라고 하는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자신이 직접 팩트체크(!)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오셨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토마에게 직접 확인해 보라고 하셨고, 토마는 그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토마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믿음이 부족한 모습으로 설명하면서, 보지 않고 믿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신앙인의 자세라고 설교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좀 다른 시각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토마가 왜 동료들의 말을 불신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였던 것은 단지 그가 따지기 좋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다른 제자보다도 더 믿음이 약해서였을까요? 교회 전승에 의하면, 토마사도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머나먼 지역,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그가 그렇게 까지 했던 걸로 보아 예수님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다른 그 어느 제자 못지않게 강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저 토마의 신앙심이 약했다는 기존의 설교들에 납득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토마는 예수님이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때, 제자들이 보인 비겁한 행위로 인해 동료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감에 빠졌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루가 22:33)”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며, 예수님 오른편과 왼편 최측근에 서로 있겠다고 아옹다옹 다툰 모습하며, 토마는 도무지 동료들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동료들에게 대해서도 신뢰를 상실한 깊은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동료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본인이 직접 체험한 것 외엔 아무도 믿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깊은 불신과 회의라는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로 인해 그의 마음과 영혼이 낫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공동번역 성서에선 행복하다라고 번역했지만, 중국어 성경에는 복이 있다(有福了)”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저는 행복하다보다는 복이 있다는 말이 더 의미가 와 닿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토마의 불신앙을 책망하신다기 보다는 토마가 받은 상처 난 영혼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토마와 동료들 간에 있었던 불신의 장벽을 허무시고 참된 신뢰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과 그 메시지가 믿을만하고 신뢰할 만 하려면 부활을 증언하는 이들이 신뢰(信賴)’할만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서로 최측근이 되겠다고 동료들을 질시하고, 경쟁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힌 옛 생활과 태도에 사로잡힌 한, 부활은 새로운 뉴스, 신선한 소식이 아니라 토마와 같이 그 소식을 듣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해프닝에 불과할 것이 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오늘 올해의 두 번째 부활주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그 복을 받기 위해선, 만일 내가 토마처럼 가정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동료들부터 실망해서 불신이라는 상처를 받았다면, 예수님께 토마처럼 그 못자국과 옆구리를 만지게 해달라고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해 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못 보았던 토마에게 우리는 보았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남들에게 자랑하기 이전에 주님의 십자가 상처를 만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기만 했을 뿐, 아직 만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다 가까이서 보고 만지고 고백할 때, 그제야 여러분은 토마가 아파했던 그 심정을 비로소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을 받으실 겁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게 주시는 부활의 복, 부활의 은총입니다. 오직 그럴 때만이 우리의 가족 구성원간의 관계, 교회 구성원간의 관계, 나아가 우리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에 놓인 신뢰가 회복되고, 믿음이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은총으로 회복된 제자들이 오늘 독서인 사도행전과 묵시록에 나온 말씀처럼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언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상처로 토마와 제자들을 치유하셨듯이, 우리의 망가지고 상처 난 관계들을 회복시켜 주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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