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부조리한 상황에서 기도하기(다해 연중29주일)
작성일 : 2022-10-16       클릭 : 191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1016 다해 연중29주일

예레 31:27-34 / 2디모 3:14-4:5 / 루가 18:1-8

 

 

부조리한 상황에서 기도하기

 

살다보면 오늘 복음 이야기에 나오는 여인처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주변에 아무도 내 편이 되어 줄 사람 하나 없는 고립무원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억울함에 분노하고 항변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무력한 자신의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절망에 빠집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처럼 소송사건에 휘말려 들었을 때, 내가 아무에게도 도움 받을 수 없는 무력한 처지일 경우, 그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루가복음 저자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앞부분에서 종말이 올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 언급한 후, ‘과부와 재판관비유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형성된 초대교회 공동체들이 처음에는 성령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이상한 언어를 비롯하여 치유기적과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일어나며 활발하게 퍼져나가다가, 외부로부터는 박해와 핍박이 시작되고, 내부적으로는 곧 재림하시기로 한 예수님의 종말예언이 실현되지 않자, 신도들의 믿음과 열정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가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과부와 재판관이야기를 전하면서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힘들어 하는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메시지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종말을 앞두고 언제나 기도하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루가 18:1)”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이야기를 시작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대개 율법학자가 재판관으로 행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여러 차례 재판관을 찾아갔지만 그는 그 사건을 다룰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과부는 약자의 상징입니다. 특별히, 고대사회에서 과부는 그중에서도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질 못하는 매우 불리한 신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마도 그녀는 마땅히 받아야 할 재산 아니면 갖고 있던 최소한의 재물마저도 친척들에게 갈취당하는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배경도 없고 재판관에게 뒷돈을 찔러 줄 돈도 없는 과부는 재판관을 찾아가 억울함을 풀어주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힘없는 약자의 상황은 사실 낯설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어서일지 모르겠습니다.

설교에 앞서서 소개한 그림에서도 묘사하고 있듯이, 그녀를 돕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경비병은 재판관을 붙들고 애원하는 그녀를 끌어내려 합니다. 재판관 옆에서 부채를 들고 있는 시종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재판관에게 빛을 가리고 부채질을 하며 재판관이 편하게 하는 것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재판관 옆에 앉은 서기는 그저 그 상황을 보고 적기만 할 뿐입니다. 재판관 뒤에 있는 사람은 재판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광경을 웃기만 하고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면서 슬쩍 손을 내밉니다. 아마도 이 일이 잘 처리되도록 급행료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 멀리 두 사람은 어쩌면 과부를 억울하게 만든 가해자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힘없는 과부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며 말하고는 있지만, 그녀가 하도 끈질기게 졸라대니 혹시 재판관이 과부 말을 들으면 어쩌지 하고 약간의 근심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비유이야기에서 또 다른 주인공, 불의한 재판관의 모습은 재미있습니다. 그는 과부의 시선을 애써 외면합니다. 그리고 한 팔로 여인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습니다. 마치 나는 할 만큼 했고, 법대로 했어. 그러니 그만 졸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반전이 생깁니다. 성서는 재판관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 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루가 18:4-5)”

마침내 과부는 부당함과 불의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승리했다고 재판관의 불의한 품성과 불의한 세상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재판관이 그녀의 권리를 찾아준 것은 그것이 공정하기 때문이라는 법의 정신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단지 과부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에 질려서 내린 결정입니다. 즉 재판관은 여전히 자신의 편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이상적인 나라,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더욱이 오늘 복음의 맨 마지막 8절에서 예수님은 그렇지만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라는 다소 비관적인 말씀으로 마무리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제2독서 사도바울이 디모데오에게 한 당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디모데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는 67년 경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었을 때 쓴 거라고 합니다. 당시 사도 바울의 상황은 상당히 비관적이었습니다. 아무도 법정에서 그를 변호해 주지도 않았고,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그라도 버림받았다는 고독감과 몰이해, 그리고 고문과 곧 집행될 사형 앞에서 심적으로 큰 시련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하느님과 깊은 유대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사랑하는 신앙의 아들 디모데오를 다시 보고 싶어 했고, 그에게 주님의 사명을 다시한번 확고히 심어주려고 펜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디모데오에게 보낸 둘째편지에는 순교를 앞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 일생을 헌신한 그의 굳은 신앙이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디모데오에게 권고합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대에게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것과 군림하실 것을 믿고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 그대는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고난을 견디어내며 복음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그대의 사명을 완수하시오.(2디모 4:1, 5)”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만일 과부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절망과 좌절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 일부는 예수께 이런 부조리하고 불의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가요?”라고 항변하고 탄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 우리는 기도할 힘마저 잃어버리고, 심지어 내 신앙이 흔들리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희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데, 희망이 사라지니 믿음까지도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는 낭만과 목가적인 시절에서 즐기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간절히 고대하는 그 절박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확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십자가라는 극단의 상황속에서도 죽지 않은 그 믿음과 희망이 절망과 좌절의 종점인 죽음을 마침내 이겼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를 믿기에 희망을 가집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의 힘은 바로 이 십자가의 신비에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위대한 성인들과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바로 이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 땅, 특별히 이 강화도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그 중에서도 먼 이역만리 영국에서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병으로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시고 우리 곁에 묻히신 알마수녀님, 로라선교사도 이 믿음과 희망으로 사신 분들입니다. 이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연약하나,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그리고 교회공동체의 믿음과 하나 될 때, 우리는 외롭거나 홀로 있지 않습니다. 이제 서로 다르지만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함으로 주님과, 교회와 하나 되어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믿음과 소망을 살아나가는 주님의 제자들이 됩시다.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시고 기도 안에서 소통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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