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두 개의 성전(다해 연중32주일)
작성일 : 2022-11-06       클릭 : 28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1106 다해 연중32주일

하깨1:15-2:9 / 2데살2:1-5, 13-17 / 루가20:27-38

 

 

두 개의 성전(聖殿)

 

다음 주일은 우리교회 설립 129주년이자 성 베드로와 성 바우로 한옥성당 축성 122주년 기념일입니다. 또한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추수감사주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머지않아 연중시기가 끝나게 되면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지 10월에서 11월로 넘어오면서 느끼는 계절감각도 확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10월은 수확의 달답게 마음도 여유롭고 주변의 단풍도 아름답다면, 11월에는 낙엽도 떨어지고 추워지기 전에 수확한 것들도 부지런히 갈무리하느라 그런지 자주 흐리고 쌀쌀한 날씨 속에 마음도 착 가라앉는 느낌입니다.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11월에 교회는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죽은 이들을 기념하며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래서 11월을 시작하는 1일에는 모든 성인의 날로, 2일에는 모든 별세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사로 인해, 우리는 이번 11월을 크나큰 충격과 우울함으로 맞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해의 마무리와 새로운 해의 준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을 생각하는 11월을 보냅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는 이런 측면에서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이라는 서로 대조되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 역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좁은 안목으로 이해하던 저 세상 관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먼저, 1독서를 보겠습니다. 하깨서는 평소에 자주 접하지 못하는 구약의 예언서입니다. 이 책은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폐허가 된 유다와 예루살렘을 보고 허탈해 하던 때,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쓰였습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하깨 예언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희망과 용기를 주십니다:

이 땅 모든 백성들아, 힘을 내어라. 그리고 일을 시작하여라. 내가 너희 곁에 있어 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지금 짓는 이 성전이 예전의 성전보다 더 영화로울 것이다.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나는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하깨 2:4, 9)”

이 구절을 읽으며 저는 고려 항몽(抗夢)시기 강도(江都)’라고 불렸던 이 터에서부터 우리성당이 세워지기까지 기나긴 우리역사의 장면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1232년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왕실을 지키고 항전하기 위해 개경에서부터 강화로 천도합니다. 그리고 관청리 일대에 황궁을 세웁니다. 그러나 1270년 개경으로 환도(還都)할 때, 몽골의 강력한 요구로 이 궁은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고려사>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화 외성까지 허물고 돌아가겠다고 몽골사신이 겁박해서 내·외성 해체에 동원된 백성들이 괴로움을 이기지 못했고, 성이 무너지는 소리에 거리의 아이들과 여염집 부녀자들까지 슬피 울었다.”

그 후, 이곳은 수 백 년 동안,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황량한 옛 황궁 터로 남아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 제1독서의 배경인 유다왕국이 바빌론제국에 멸망당해서 옛 왕궁과 성전이 폐허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하느님의 섭리로 이곳에 동양과 서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우리식 교회건축인 천주성전(天主聖殿)’이 세워졌습니다. 동양건축의 위계로 볼 때, (殿)은 당()보다 한 등급 위인 건물이자 가장 격이 높은 건물로서 왕과 왕비 등이 쓰는 전각을 칭할 때 씁니다. 또한 일상 기거공간이라기 보다는 의식행사나 공적활동을 하는 건물을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건물의 편액에 천주성당이라고 쓰지 않고 천주성전이라고 명명한 것은 만물의 참 된 근원(萬有眞原)’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봉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구약의 하깨 예언자는 폐허가 된 옛 터에서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언서를 읽으면서 이것이 그저 멀리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머물지 않고, 우리 역사에서도 일어난 하느님의 역사(役事)하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2독서를 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카 교회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재림이 이미 왔고, 내가 성령을 받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며 성전에 자리 잡고 앉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가짜 그리스도를 경계하라고 충고하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성전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기에 온갖 감언이설에 흔들리고 속아 넘어갈 위험이 더 큽니다. 사도바울은 신도들의 나약한 믿음을 흔드는 가짜 지도자들을 경계하라고 하면서 올바른 전통을 굳게 지키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왜 신도들이 그런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흔들리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고방식이나 기대심리에 비춰서 하느님의 진리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신명기 255절부터 10절에 나오는 수혼법(受婚法)을 내세워 예수께 질문합니다. 수혼법에 따르면, 형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경우,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혈통을 잇게 해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만일 일곱 형제가 모두 한 부인과 결혼했다는 가정 하에, 부활할 때 그 부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현세의 삶이 부활 이후에도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에서 나온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 이후에도 현세의 사정이 그대로 계속된다는 전제하에 질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설파하신 부활의 세계란 이승의 연장이 아니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창조되는 온전히 새로운 세계입니다. 더 나아가 이승과 저승이라는 이분법 속에 갇혀있는 그들을 향해 하느님 안에서는 이승에서 살고 있는 자와 저승에서 죽은 자라는 경계가 의미 없다고 하시며, 모세가 불붙은 가시덤불을 보고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부른 성경말씀을 상기시키며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루가 20:38)”라고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모두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인간의 짧은 경험세계와 거기에 기초를 둔 좁은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때, 새로운 세계와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이럴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성전에 들어오게 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성전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마음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없다면 세워지거나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듯이,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성전에서 눈에 보이는 성전을 만듭니다. 우리교회를 되돌아보더라도, 우리에게 신앙을 전수해 준 선교사들과 그 신앙을 받아들인 선조들의 마음 안에 영적성전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보는 이 성전을 지었고,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느님께 감사의 성찬례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두 개의 성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이 성전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그리고 오늘 우리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는 전 세계에 걸쳐 자신들의 성전을 잘 보전하고 가꾸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영혼의 성전입니다. 이 영혼의 성전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와 공부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찾고, 내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각자는 지금도 그리고 미래도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생동하는 살아있는 존재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신비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이 선물로 주신 두 개의 성전을 잘 가꾸고 발전시켜 나갑시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에 필요한 성전을 세워주시고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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