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그 날과 그 시간이 오더라도(가해 대림1주일)
작성일 : 2022-11-27       클릭 : 25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1127 가해 대림1주일

이사 2:1-5 / 로마 3:11-14 / 마태 24:36-44

 

그 날과 그 시간이 오더라도

 

지난 화요일 저는 송산교회 강 신부님과 함께 교무구 성직자 모임에 참석하러 온수리교회로 가고 있었습니다. 강 신부님이 어깨에 담이 걸려서 아프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월요일 쉬는 날에 근처 산에 올라 정상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데, 교우분이 버스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나서 BS병원 응급실로 이송중이라는 전화가 왔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2시간 걸려 올라간 산에서 30분 만에 헐레벌떡 내려와 병원에 가느라고 몸이 놀란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는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 선배신부님들의 말에 새삼 공감했습니다.

사실, 갑작스레 일어나는 일에 대처하는 것은 비단 사제들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방대원들도, 군인들도, 경찰들도, 응급실에 있는 의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업이나 국가의 책임자들도 돌발 상황에 얼마나 잘 대처하는가가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교회력으로 새해인 대림1주일. 교회는 우리에게 갑작스럽게 닥치는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고 초대합니다. 예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아들이 생각지도 않을 때 올 터이니 늘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늘 준비한다는 자세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상(日常)이란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생활패턴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삶이 안정된다는 면도 있지만, 변화를 감지하는 감각이 무뎌지는 다른 측면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안정된 생활이 지속되고, 더 나아가 점점 풍요로워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만하여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로마 13:13)”

동양의 고전인 중용(中庸)에는 군자는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戒愼乎 其所不睹), 들리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두려워한다(恐懼乎 其所不聞)”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신독(愼獨)’이란 단어는 홀로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언행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추구하던 개인수양의 최고단계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라고 한 권고와 일맥상통합니다.

이러한 동서양의 가르침에 대하여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늘 준비하고 깨어있는 삶을 산다고 하면,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재미없겠습니까? 때때로 흩뜨려지는 모습도 있고 해야 그것이 삶의 재미 아닌가요?” 일견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그리고 공자와 맹자께서 말씀하신 덕목은 항상 긴장하고 근엄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분들도 즐거울 땐 즐거워하셨고, 슬플 땐 슬퍼하셨고, 때로 화가 날 땐 화도 내신 분들입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하신 대낮처럼 바르게 살라는 말씀은 우리가 천성으로 갖고 있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올바로 사용해야지 잘못 사용해선 안된다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잘못된 감정과 행동을 어둠의 행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 어둠의 행실을 벗어나서 하느님이 태초에 우리에게 주신 올바른 감정으로 회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로마 13:11)”

다시 말해,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리고 우리가 미몽(迷夢)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허황된 꿈, 잘못된 생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이것을 회개(悔改)와 회심(回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회개(penitence)가 내 잘못을 참회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이라면, 회심(convert)은 나의 잘못된 생각, 생활방식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서 올바른 방향,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께로 되돌아오는 존재론적 차원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회심이 회개보다 더 근원적이고 종교적인 변화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회심하였다면, 그럼 어떻게 될까요?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는 그 한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회심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미래의 비전을 내다보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수많은 민족이 야훼의 산, 하느님의 성전에 모여서 하느님께 예배드릴 것이며, 민족들은 더 이상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고,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는 참된 평화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이사 2:1-4 참조). 사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민족만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야훼 하느님을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좁은 생각을 갖고 있던 예언자들을 회심시켜서 온 민족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넓은 마음을 느끼고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의 열매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예측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화하고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이며, 세계경제를 보더라도 과거와 달리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고물가로 인해 가계부담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듯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날과 그 시간의 긴박성을 무디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달력도 이제 12월 한 장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각종 모임에서 우리는 한해를 보내는 송별모임들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늘 반복해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것입니다. 세상의 달력보다 대림절로 한 해를 먼저 시작하는 교회는 우리에게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라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 날과 그 시간을 잘 맞이하기 위한 연습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연습은 단지 전례적이고 종교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잘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인생 훈련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주님의 오심을 잘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오실 주님의 날을 당황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이것이 대림절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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