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만남과 회복(다해 부활3주일)
작성일 : 2019-05-05       클릭 : 340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다해 부활3주일(사도9:1-6 / 요한21:1-19)

 

만남과 회복

 

세상에는 다양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에 대한 유명한 표현들도 제법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글 중 하나가 아마도 논어論語<학이學而>편에 나오는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가 아닐까 합니다. 그 뜻은 벗이 있어 멀리서 오니 또한 기쁘지 않은가!”입니다. 중국어로 친구를 펑요우(朋友)’라고 하는데 여기서 의 원래 뜻은 그냥 친구가 아니라 뜻을 함께 친구, 동지(同志)’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일반적인 친구로까지 뜻이 변한 것입니다. 사실, 공자는 논어에서 임금 혹은 제후가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기 위해 갖춰야 할 덕을 설파한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벗이 있어 멀리서 오니 기쁘지 않은가!’라는 말은 무조건 임금의 명령만 따르는 신하가 아니라 임금과 뜻을 함께 하면서 세상을 올바르게 이끄는 마치 동지와 같고, 벗과 같은 신하가 있고, 동시에 그러한 신하가 먼 곳으로부터 임금 곁으로 와서 올바른 정치를 위해 함께 일하니 얼마나 기쁘겠는가라는 의미가 담긴 구절입니다. 참으로 임금과 신하 간에 바람직한 만남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은 만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바울, 아니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이름을 가졌던 사울과 예수님과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의 만남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아주 극적이면서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변화, 달리 말하면 회복내지 치유를 가져왔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회심 전 이름인 사울과의 만남을 봅시다. 사울은 유대교를 철두철미하게 배운 지식인이었기에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일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을 볼 때, 심한 모독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볼 때 그들은 유일하신 주님의 신성함을 훼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들을 박멸함으로써 주님께 충성스런 의인역할을 자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마스커스에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 그는 하늘에서 비춰오는 엄청난 빛을 받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초월자이신 야훼 하느님이 예언자들에게 당신을 계시하는 것과 같은 영적현상인 것입니다. 사울은 마치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주님의 존재를 물었던 모세처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는 아마도 거룩한 하느님의 현현을 통해 그가 믿고 있던 신앙에 대한 확신 내지 격려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그 빛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얼마나 청천 벽력같은 말씀입니까! 사울은 실로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서는 그가 사흘 동안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9:9)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실로 사울에겐 죽음과 같은 대사건이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 사울은 죽은 것입니다. 후에 그는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개명함으로써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세례받을 때 세례명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때의 영적체험을 바탕으로 후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로마 6,6) 이처럼 바울과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은 신념과 신앙이 180도로 변화되는 총체적인 회심이요, 대변혁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사건처럼 육신의 사울을 못 박고, 영적인 바울로 부활한 사건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부활한 예수님과 제자들, 특별히 베드로와의 만남을 봅시다. 바울과 달리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3년간 스승 예수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은 이들의 관계를 산산조각으로 파탄내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마치 3년 전 스승 예수님을 만나기 직전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10년 공부 도로 나무아미타불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3년 전의 그 때랑 3년이 지난 지금이랑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내면마저 같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기억을 완전히 지우고 3년 전 아무 것도 몰랐던 때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3년 동안 스승 예수와 함께 하면서 배우고, 느끼고, 나눴던 추억이 너무나도 깊이 가슴 속에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스승 예수님의 깊은 뜻을 아직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고 있지만 그분을 통해 보고 배운 엄청난 지혜의 말씀과 사랑의 실천 그리고 놀라운 기적들은 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그들의 존재를 흔들어 깨우고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스승 예수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들에게 3년 전 그들이 불림 받았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고생했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아 올 때 호숫가에서 한 사람이 무얼 좀 잡았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들이 아무 것도 못 잡았다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져 보시오.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과연 엄청난 물고기를 낚았습니다. 마치 3년 전 그때처럼 말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그들은 바울처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은 3년간 스승과 함께 살았기에 그 분이 누구라는 것을 명명백백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엄청난 좌절과 혼란으로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만남은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회복의 만남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그 유명한 요한의 아들의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3번의 질문과 3번의 대답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스승을 3번 모른다고 잡아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선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물으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던 것은 뻔뻔한 변명일까요? 저는 그가 겁 많고 나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내면 깊숙한 곳에선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배교와 회개를 밥 먹듯이 하는 키치지로가 연상됩니다. 그는 때로 가롯 유다처럼 배신했다가, 때로는 베드로처럼 돌아와 회개하기를 반복합니다. 긴 세월이 흘러 서양신부도 그도 그리고 주변인들도 다들 배교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때, 정기적으로 하는 신자 색출 의식에서 그는 자신의 품 안에 간직해 왔던 자그마한 성물이 발각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의 진정한 속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갈대와 같은 키치지로가 마침내 순교하게 됩니다. 인간의지의 강함과 약함이 신앙 안에서 역설로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하는 듯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한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 존재 내면에 감춰져 있는 신앙을 회복시키는 정화(淨化)의 예식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다시 만남을 통해 정화된 베드로는 이제 동료들에게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매번 대답할 때마다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내가 너를 치유하고 회복시켰다. 이제 더 이상 너 안에 갇혀 지내지 말아라. 그리고 나아가 내가 했던 것처럼 너도 동료들에게 힘이 되고 울타리가 되어 주어라는 주님의 당부가 아닐까요? 이제 베드로는 수동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만으로 머물지 않고 뜻을 함께 나누는 벗, 펑요우(朋友)가 된 것입니다. “멀리 있던 벗이 이렇게 가까이 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라는 공자의 기쁨처럼 예수님도 이 만남을 통해서 기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진정한 벗을 얻은 기쁨의 만남,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만남을 경험합니다. 어떤 만남을 우리를 기쁘게 하고, 설레게도 하지만, 반대로 어떤 만남을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아프게도 합니다. 특별히, 신앙 안에서 여러분은 어떤 만남을 하셨나요? 개인적으로든, 교회 공동체에서든 때로는 바울처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만남일 때도 있고, 때로는 실의에 빠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다시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만남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만남은 모두 그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게 합니다. 마치 감사성찬례 마지막 파송예식 때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외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말씀과 성찬으로 주님과 만남을 통해 다시 회복하고 그 영적 힘으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의 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당부하셨듯이, 사제는 교우들을, 교우들은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잘 돌보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 이야기 맨 마지막에 하신 말씀, “나를 따르라는 오늘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과 만나서 회복되고, 예수님을 힘차게 따르는 한 주간이 되길 바라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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