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20 다해 연중 제7주일 창세 45:3-11, 15 / 1고린 15:35-38, 42-50 / 루가 6:27-38 용서할 수 있는 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험난합니다. 변화가 거의 없거나 혹은 있어도 비교적 천천히 일어나서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현대인의 삶은 날이 갈수록 숨이 찰 만큼 빨라지고 있고, 그만큼 급격한 변화가 많아졌습니다. 뉴스를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건물이 무너지고, 강도를 만나 폭행을 당하고, 살인범에게 딸을 잃는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당하고, 주식이 폭락하고,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등등 피할 수 없는 상황에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파다합니까! 이러한 이유로 세상에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엄청 많습니다. 오늘날 심리학과 의학에서는 이러한 상처를 트라우마(trauma),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트라우마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받은 상처에서부터 커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트라우마와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겪은 상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분노와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그러한 기억을 회피하려고 약물이나 다른 것에 과도한 집착을 하거나, 아니면 심한 무력감으로 시달립니다. 이런 현실 속에 오늘 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남을 용서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마음의 상처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소력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래서 흔히들 종교에서 용서를 권하는 것이 때론 상처받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더 자극해서 반발할 수도 있으며, 심할 경우 하느님과 종교에 대하여 원망하기도 합니다. 결국, 상처받은 사람이 완전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채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고통의 세월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자문해 봅니다: 얼마나 지나야 마음의 상처로부터 다시 구원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마음의 문을 닫은 이가 그래도 아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신이 우리를 보살펴주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믿을 수 있을까? 만약 다시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걸까? 이러한 여러 가지 질문에도 불구하고, 피부의 상처가 저절로 아물 듯이, 마음의 상처도 점차 치유될 수 있을 거라고 소망해 겁니다. 물론 상처의 깊이와 무게에 따라 치유의 방법과 시간에 차이를 보이겠지만, 치유와 용서가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가 들은 요셉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마음의 상처로 힘들어 하는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야곱의 12아들 중 하나인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성서에는 야곱이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하였다. 이렇게 아버지가 유별나게 그만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형들은 미워서 정다운 말 한 마디 건넬 생각이 없었다(창세 37:3-4)”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린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이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정서적 안정과 만족을 주었지만, 반대로 다른 형제들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그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혔고, 장차 형제간 증오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요셉은 꿈에 아버지와 형들이 모두 자기에게 절한다는 꿈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형들의 공분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요셉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가 지나친 과잉보호 속에서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일종의 특권의식이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결과, 형들은 들판에 온 요셉을 구덩이 쳐 넣은 후, 지나가던 상인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은 필시 이 사건이 그의 일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커다란 트라우마가 되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가장 사랑스러운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외국 땅으로 팔려간 노예로 전락했으니 말입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외국 땅 이집트, 그것도 노예라는 사회의 맨 밑바닥 신분에서 요셉은 그야말로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며 그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요셉은 다른 노예들과 달리 능력이 출중해서 파라오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주목을 받아 집안 관리를 맡게 되었고, 성실하고 능력 있고 양심적으로 일한 덕분에 보디발의 집안은 점점 부요해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보디발은 요셉을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집안의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행복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국땅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고 무탈하게 살 것 같은 요셉에게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그것도 자신을 그리도 신임하고 있는 주인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말입니다. 요셉으로서는 형들로부터 구덩이에 빠진 이래로 두 번째로 다가온 인생의 큰 구덩이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자신이 미처 생각지도 못하게 당한 충격이었지만, 이번은 자신이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 하는 인생의 기로였습니다. 인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부터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심을 몸소 체험했던 요셉은 설사 엄청난 비난과 몰락의 위험이 닥칠지라도 양심에 따라 의로운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의 아내가 유혹하는 불의한 요청을 거절하였고, 그 결과 그녀의 중상모략으로 주인의 분노를 사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다시한번 그의 인생은 큰 좌절을 겪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지켜냅니다. 그런 그를 하느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감옥의 간수장과 좋은 관계를 맺게 해 주십니다. 마침, 파라오 왕이 난해한 꿈을 꾸고 그것을 해석하라고 명했으나 주변 신하들이 아무도 못 풀어서 크게 질책 받을 상황에 처한 소식을 들은 요셉은 그들에게 그 뜻을 풀어주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그렇지만 신하는 일개 죄수의 도움을 금방 잊어버리고 2년이란 세월이 흐릅니다. 2년 후, 파라오가 또다시 꿈을 꾸고 그 신하에게 해석해달라고 하자, 그제서야 그 신하는 예전에 꿈을 해석해 준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어느 죄수라고 하였고, 왕은 감옥에 있던 요셉을 불러들여서 도움을 청합니다. 슬기롭고 지혜롭게 답변하는 요셉의 능력에 마음이 흡족한 왕은 그에게 나라 일을 맡깁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의 역량을 모두 쏟아 부어 자연재해로부터 국가와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냅니다. 그리고 그 명성이 주변나라와 인근지방에까지 두루 퍼져서 많은 이들이 이집트의 도움을 받으러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대목은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의 명재상을 만나서 도움을 청하러 왔다가 그 재상이 바로 자신들이 팔아버린 동생 요셉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놀라움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형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나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워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 5-8) 참으로 감동적인 용서와 화해의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하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철부지 요셉은 인생의 숱한 역경을 헤치면서 성숙하고 사려 깊고 인생의 깊은 뜻을 성찰하고 이해하는 현자(賢者)로 성장하였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요셉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들의 인생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가족과 친척들, 혹은 직장에서 기쁜 일도 있지만 갈등과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 지난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요셉처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숙해져서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평생 속으로 안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상처를 다 이겨낼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을 내 안에 모시고 삽니다. 그래서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상처가 있다 하더라도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힘입어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느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요셉처럼 인생학교를 통하여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시기 하고, 때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주시는 부활사건처럼 우리를 당신의 초월적이고 신비한 방식으로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화해를 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초초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하루하루 여러분의 길을 묵묵히 걸으시면 주님의 은총은 상처받은 우리를 점차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할 힘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상처받은 우리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