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오해와 편견이 불러일으킨 비극(다해 성지[고난]주일)
작성일 : 2022-04-10       클릭 : 254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410 다해 성지(고난)주일

루가 19:28-40

이사 50:4-9 / 필립 2:5-11 / 루가 23:1-49

 

 

오해와 편견이 불러일으킨 비극

 

이번 주일부터 다음주일까지 우리는 예수님 생애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기념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롤러코스터보다도 훨씬 더 심한 굴곡진 인생의 드라마입니다그 첫 번째 예식으로 오늘 우리는 모두 성지가지를 들고 2000년 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처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루가 19:38)”하고 환호하며 행진했습니다. 그러나 수난복음을 읽을 때, 우리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하여 '그 사람은 죽이고 바라빠를 놓아주시오!(루가 23:18)', '십자가형이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루가 23:21)'라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처럼 찬양과 저주라는 완전히 모순된 행동에 대하여 어떤 생각과 감정이 드셨나요?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성지주일 복음과 수난복음을 들을 때 마다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극단적 반응을 납득하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어찌 이렇게 변덕이 죽 끓듯 한단 말인가!”

신학을 공부하고 그리고 성서말씀을 묵상하고 무엇보다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겪음에 따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오늘 복음에 등장한 다양한 사람들은 다들 자신들 입장과 이해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었고, 이것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이죠.

그럼, 그 오해와 편견은 무엇인가요?

먼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을 봅시다. 당시 유대지방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원만히 통치하기 위하여 각 지역의 종교풍습을 일정 정도 허용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당국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교 종교예식을 유대인들이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종교집단은 로마제국의 지배자들과 약간의 긴장관계는 있지만, 대체로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종교적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래아 변두리 지방에서부터 불기 시작한 나자렛 사람 예수의 언행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해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逾越節) 혹은 과월절(過越節)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영향을 행사할까 봐 전전긍긍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식민지 지배와 그에 기생하여 살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꾸짖고, 그 옛날 다윗과 솔로몬왕 시대처럼 자랑스러운 나라와 종교를 되찾아줄 걸로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종교 상층부에게는 위협이 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이들의 우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이렇게 놔둔다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요한 11:48)”

그들은 이를 막기 위해 가롯유다라는 배신자를 이용하여 군중이 없는 밤에 몰래 예수님 일행이 있던 곳을 급습해서 예수님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것을 빌미삼아 예수에게 신성모독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러나 신성모독죄를 근거로 빌라도에게 고발할 수 없기 때문에 부정직하게 정치적 구실을 만들어내 로마의 응징을 받게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빌라도를 봅시다. 로마황제가 파송한 총독인 그의 입장에선 신성모독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대민족과 유대교 내부문제일 뿐입니다. 그의 관심은 이 자가 로마제국의 질서에 도전했는지 여부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이유로 예수가 스스로 왕이라고 하면서 로마에 도전했다고 빌라도에게 고발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로마법 절차에 따라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특별한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과월절 축제 기간에 폭동을 일으킨 바라빠를 더 위험인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재판정 앞에 몰려든 군중이 축제기간 중 관례에 따라 한 사람을 풀어주려거든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강한 요구와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예수님을 희생양삼았습니다. 그에게는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안정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현실지배세력과 타협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전례말씀에서 가장 모순된 말을 했던 군중들을 봅시다. 성서에는 군중이란 표현으로 뭉뚱그려 서술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군중전체가 그런 모순된 행동을 했기 보다는 군중들 중 일부는 예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었던 반면, 또 다른 일부 군중은 예수께 극단적인 반감을 갖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잘못 해석하여 그분께 열광했다가 등을 돌리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가롯유다와 같은 극단적 민족주의자 내지 정치적 야심가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당국과 적당히 타협한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집단과 평소에는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님이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로마적인 예루살렘의 종교집단과 그를 추종하는 군중 그리고 반()로마적인 혁명당원 계열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에 대하여 이해가 일치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보면 루가복음저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들을 수많은 제자들(루가 19:37)”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걸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아마도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감화받고 예수님을 따라 온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 대부분은 예루살렘의 종교와 정치 권세가들에 비하여 연약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께서 억울하게 십자가형을 언도받고, 해골산 형장으로 가실 때,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던 것입니다. 성서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뒤따랐는데 그 중에는 예수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루가 23:27)”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당시 종교와 정치를 주무르고 있는 상층부들에 의해서 종교적으로는 신성모독으로, 정치적으로는 국가반역죄로 조작된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고대했던 메시아, 즉 정치적이고현세적인 구세주에 대한 기대가 꺾인 채로 끝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활을 모를 때까지의 이해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현세지향의 종교와 다른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이 없으면 그저 하나의 실패한 역사적 사건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저는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2000년 전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을 함께 걸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제2독서 필립비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역사 이전, 즉 태초부터 존재하셨지만 이제 우리 인간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립 2:7-8)”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왕이요, 참으로 메시아, 즉 구세주인 것은 바로 이처럼 '자기비움(Kenosis)''섬김의 리더쉽(Servent Ledership)'을 철저하게 구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 2:5)”

오직 이런 마음을 간직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와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그분과 함께 묵묵히 부활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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