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전통과 새로움(다해 성목요일)
작성일 : 2022-04-14       클릭 : 271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414 다해 성 목요일

출애 12:1-14 / 1고린 11:23-26 / 요한 13:1-17, 31-35

 

 

전통과 새로움

 

교회는 성삼일(聖三) 첫날 성 목요일에 두 개의 중요한 전례를 거행합니다. 낮에는 교구장 주교의자가 있는 주교좌성당에 모여 한 해 동안 쓸 성유를 축성하고, 서품 때 서약한 약속을 갱신하는 의식을 갖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하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합니다. 우리 성공회 기도서에는 이를 성찬제정예식이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하는 감사성찬례(미사)의 핵심인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목요일(Holy Thursday)은 신품성사와 성체성사를 세운 날입니다.

저는 매년 성목요일을 지낼 때마다 신학생 시절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우리는 사순절 매 금요일마다 성당에 모여 ‘14처 십자가의 길을 했는데 풋내기 신학생이었던 저에겐 이 예식이 무겁고 꽤 지루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목요일에는 신품성사와 성체성사를 세운 이른바 사제들의 생일이라서 학교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이 나와 기분이 좋았고, 저녁식사를 먹고 성목요일 예식을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던 기억이 납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제 심정은 마치 예수님이 곧 잡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맛있는 음식에 즐거워했던 제자들과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예배의 근간인 빵과 포도주의 축성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예수님이 제정하신 이 의식이 유대교의 전통을 어떻게 이어받았으면서도 또한 어떤 면에서 새로운 건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예식이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성체성사와 감사성찬례(미사)도 아무 맥락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셨던 예수님과 그 일행은 해마다 과월절(過越節)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월절(逾越節)이라도 번역하기도 하는 이 날은 아람어로 '파스카(Pascha)'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거르고 넘어가다(passover)’ 혹은 통과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제1독서는 파스카 축제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노예에서 탈출하기 직전, 문설주에 양과 염소의 피를 발라서 천사들이 그걸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벌주지 않고 이집트인들에게 벌을 내렸으며, 동시에 그들은 누룩 없는 빵을 먹고 다음날 일찍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해방 전야(前夜)’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파스카 식사예식을 하면서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노예에서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고 찬양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이 파스카 식사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구체적으로 어떤 의식을 했는지는 오늘 제2독서인 고린토 전서에서 사도 바울의 증언이 성경에 나와 있는 가장 오래된 증언입니다. 현재 신약성서가 복음서부터 배치되어 있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부터 썼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예수님 승천 후, 시간이 꽤 흘러서 집필되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사도들의 선교로 각지에 교회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각 공동체에 편지를 쓴 것이 먼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고 어떻게 기념하라고 하셨는지가 성체성사에 관련된 최초의 성경기록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를 근거로 오늘날 성체성사와 성찬의 전례를 발전시켜서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최후만찬은 구약시대 파스카 정신, 즉 노예생활에서 우리를 구해내셨다는 구원과 해방의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더 심오하고 새로운 차원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 있는 세족례(洗足禮)’입니다.

세족례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서에만 나옵니다. 사실, 오늘 예배의 초점은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마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당신의 몸과 피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파스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해내신 옛 계약을 대신해 십자가의 희생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새로운 계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체제정보다 세족례는 부차적인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세족례는 새로운 계약을 통해 형성될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델을 보여줬다는 의미에서 성체제정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족례를 손수 시범보임으로써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너희도 그대도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 13:14-15)”

그러면 이 서로 섬김이라는 실천의 정신적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보다 더 근원적인 계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그렇습니다. 세족례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유언으로 남기신 것이 사랑의 정신섬김의 실천입니다. 이 두 개는 영혼과 육체, 안과 바깥처럼 하나인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세족례는 성체제정보다 더 본질적인 요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세족례의 정신이 없는 성체성사 혹은 감사성찬례와 비록 감사성찬례를 못할 수도 있지만 세족례의 정신을 살아가는 것 간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사랑과 섬김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더 본질적 요소일 것입니다. 물론, 신자로서 주님의 몸과 피를 영하는 성체와 보혈이라는 전례생활이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은 먼저 예수님이 계명으로 주신 사랑과 섬김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 새로운 계약은 구약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보다 더 심오하고 보편적으로 온 세상 사람에게 구원의 빛이 된 것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고 우리는 세족예식을 거행할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예식은 발을 닦아주는 평범한 의식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에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섬김의 유언을 주신 그 마음을 느끼면서 우리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길을 따르길 다짐해 봅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는 이것을 알았으니 그대로 실천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요한 13:17)”

 

 

 

예수님이 주신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고 천상의 복을 받길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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