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부활 - 죽음의 공허함을 뚫은 사건(다해 부활밤)
작성일 : 2022-04-16       클릭 : 260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416 다해 부활 밤

창세 7:1-5, 11-18; 8:6-18; 9:8-13 / 출애 14:10-31, 15:20-21 / 에제 37:1-14

/ 로마 6:3-11 / 루가 24:1-12

 

 

부활 - 죽음의 공허함을 뚫은 사건

오늘 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기뻐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활! 다시 살아난다는 것! 이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아멘!”하고 고백하고,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시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갖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6:8)

사도 바울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라는 말씀에 앞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부활을 말하기 앞서서 죽음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것입니다.

죽음! 이것은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가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숙명입니다. 모든 존재는 언젠간 죽습니다! 없어집니다! 소멸합니다! 그런데 아직 죽음도 겪어보지 못한 우리가 부활을 감히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고 죽은 자만이 부활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면 저나 여러분은 모두 자격미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도 모르면서 어찌 부활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비록 우리는 죽어보진 않았지만, 우리 주위에 죽은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죽음에 대하여 간접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크리스천인 우리는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상의 죽음을 매년 성 금요일마다 전례예식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이란 그냥 평범한 죽음이 아닙니다. 엄청난 매질과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재판, 그리고 마침내 피투성이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매고 대못에 박혀 극심한 고통 속에 생명을 잃은 그런 죽음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바로 이런 죽음을 묵상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그러한 고통과 죽음을 기념하는 걸까요? 우리의 본성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상의 죽음은 우리의 본성과는 반대되는 어찌 보면 피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고통스런 죽음은 늘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두 가지 예를 말씀 드릴까 합니다.

하나는 공황장애로 고통 받고 있는 제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제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는 오래 전 사업실패로 크나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는 공황장애를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지하철, 비행기,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했습니다. 그런 공간에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히고, 죽을 것만 같은 극도의 공포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친구에게 죽음이란 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잠깐씩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유령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예로,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 본 종군기자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중동지역의 전쟁현장을 취재하는 기자였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머물고 있던 곳에 엄청난 굉음이 들려서 황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얼굴을 가리고 쓰러져 있는 자신의 동료를 발견했습니다. 그 동료를 구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 그 동료는 포탄 파편으로 신체의 일부분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그 충격적인 모습을 본 순간, 그 기자는 갑자기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면서 극도의 공포체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는 그런 체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군인들과 그들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이 봤던 하얀 그 무언가의 정체, 그리고 그 이후 자신의 삶을 극도로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공허감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전쟁터에서 죽음의 공허감을 맛본 군인들, 민간인들, 기자들이 그 후 술과 마약, 그리고 극도의 불안과 무기력과 같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이러한 외상 후 장애가 극심하게 되면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이라는 맨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허감은 그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며 파멸로 몰아가는 겁니다.

불안, 공포, 죽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존재를 위협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평소에 이런 것들을 잊고 있습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마치 영원히 안전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허감은 우리 주위를 맴돌면서 잠깐 잠깐 자기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어느 날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사업의 실패로 경제적 기반이 송두리 채 무너질 때, 또는 시내 한복판에서 폭탄테러로 무고한 시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날벼락을 맞을 때, 지금도 미얀마와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 죽음은 그 맨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지만 현실은 우리도 그 가능성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불행한 사실은 우리가 이것을 외면하고 회피함으로써 죽음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우리를 고립시킨 다음 서서히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를 서로 단절시키면서 파멸로 이끕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로마6:8)라는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자신의 고통, 이웃의 고통을 회피하고 외면하지 말고 연대하고 공감하라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자신이 고통 받고 있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 죽음의 트라우마를 외면하지 않으며 공감하고 연대할 때만이 죽음의 현상, 죽음의 문화를 이길 힘이 생길 겁니다. 주님의 빈 무덤을 보고 나가서 제자들에게 알린 여인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여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루가 24:6)

죽음의 공허감을 극복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이상 거기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일 우리 중에 지금 불안과 공포와 심지어 죽음의 공허감에 힘들어 하신 분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희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죽음의 고통을 넘으셨고, 마침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내 주변에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을 줍니다. 하느님의 커다란 선물입니다. 낙담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 여인들처럼 이제 우리는 자신 안에 불안에 떨고 있는 내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 주변에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희망의 메시지를 알립시다.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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