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우리는 행동을 통하여 남에게 판단 받아야한다(다해 연중15주일)
작성일 : 2022-07-10       클릭 : 22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710 다해 연중15주일

아모 7:7-17 / 골로 1:1-14 / 루가 10:25-37

 

 

 

우리는 행동을 통하여 남에게 판단 받아야한다

 

성공회는 10년마다 한 번씩 전 세계 주교들이 영국에 모여 세계성공회가 당면한 현안에 대하여 기도하면서 토론하고 방향을 정하는 람베스 회의(Lambeth Conference)’를 합니다. 원래는 2008년 이후 10년인 2018년에 개최되어야 했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2022년 올해 열리게 되었습니다. 1867년 처음 열린 람베스 회의는 올해로 15번째 회의입니다. 727일부터 88일까지 열리는 이번회의의 주제는 하느님의 세계를 위한 하느님의 교회(God's Church for God's World)’입니다. 이 주제는 신약성서 베드로의 첫째편지에 있는 성서메시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사목과 신학교육, 환경과 정의 등 세계적이면서 동시에 지역적인 이슈들에 대하여 전 세계 주교님들이 기도 중에 식별하면서 향후 10년간 세계성공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을 청하며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신자 분들 중에 전 세계 주교님들의 회의를 왜 람베스회의라고 부르는지 궁금하실 것 같아서 람베스에 대하여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람베스는 영국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스 강(River Thames)강변 남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서울시 안에 여러 개의 구()가 있듯이, 람베스도 런던 중심에 있는 하나의 구입니다. 이 구를 람베스 구(Borough of Lambeth)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의 집무공간인 람베스 궁(Lambeth Palace)이 있기 때문입니다. 템스 강 남쪽 강변에 있는 람베스 궁 반대편인 템즈강 북쪽 강변에는 대형시계탑으로 유명한 빅벤(Big Ben)이 있는 영국의사당(Palace of Westminster)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템스강 북쪽지역에는 영국여왕의 거처인 버킹엄 궁(Buckingham Palace)도 있습니다. 마치 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세속권력을 대표하는 왕궁과 의사당이 있고, 남쪽은 신권을 상징하는 람베스 궁이라는 주교관저가 포진한 형국이라 하겠습니다. 람베스 궁은 이런 의미에서 영국 정치와 종교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으며, 18~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대영제국의 종교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 처음으로 전 세계 성공회 주교가 모여 회의하려고 할 때, 아주 자연스럽게 영국 성공회의 중심이자 세계 성공회의 중심인 람베스에서 하게 된 것입니다.

2017년 영국 출장을 갔던 저는 영국성공회의 배려로 람베스 궁에 들어가 궁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담당자분들로부터 친절하게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주요한 성공회 성당들도 방문하였습니다. 그 중 인상적인 문장(紋章)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우리는 행동을 통하여 남들에게 판단 받아야 한다(Spectemur Agendo)”라는 람베스 자치구의 라틴어 문장입니다. 서울대학교의 문장이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고 성공회대학교의 문장이 세상의 빛(lux mundi)’이듯이, 오늘날 주요대학은 라틴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의 왕실, 가문, 교회, 대학, 심지어 정치조직들이 자신의 문장과 휘장을 사용한 풍습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강화읍교회도 베드로의 열쇠와 바우로의 칼을 교회 상징으로 하고, 우측에는 성신의 검을 받아 쥐어라(行執聖神之劒)’, 좌측에는 '천국의 열쇠를 주노라(賜爾天國之鑰)’라는 문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영국과 세계성공회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람베스 자치구의 문장, ‘우리는 행동을 통하여 남들에게 판단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율법에 뭐라고 가르치고 있냐고 하시자, 그는 구약 신명기에 있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규정을 언급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의 대답이 맞다고 하시며 그대로 실천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율법학자를 오늘날 직업으로 보자면, 법률가이자 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이 신학적인 질문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법률적인 질문, 다시 말해 이웃이라는 것을 법률적으로 어디까지 규정할 거냐는 법적 한계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솔로몬 왕 사후, 왕국이 북쪽으로는 이스라엘, 남쪽으로는 유다로 갈라졌을 때 이스라엘 왕국에 살던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아시리아제국에 멸망당한 후, 이방민족과 섞이면서 혼혈이 되고, 그에 따라 종교풍습도 섞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남쪽 유다인들은 그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며, 정통 유대인이 아닌 서자(庶子)취급을 하며 멸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근거로 예수께서는 유대인 율법학자가 누가 내 이웃이냐라는 질문에 유다인들이 보기에 이웃범주에도 끼지 못하는 사마리아인을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대척점으로 유다인 중에 유다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제와 사제가문인 레위인을 정반대 인물로 설정하십니다. 그 뜻은 교리와 법률에 해박한 유다교 사제와 레위인과, 이론적으로 그들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으로 보면 정통파도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사랑을 실천할 실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예측을 뒤집어 버리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교리나 법률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실천을 통하여 율법학자와 청중들로 하여금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 판단하도록 하십니다.

설교 제목으로 람베스 자치구의 문장, “우리는 행동을 통하여 남들에게 판단 받아야 한다(Spectemur Agendo)”는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지식을 많이 갖고 있으면 그에 걸맞게 실천도 잘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손과 발까지 거리는 어쩌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보다 더 멀고 험난한 거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기에 행동으로 판단 받고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깨는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하고, 사제들과 레위인을 대비시킨 이유는 지식이 있다고 해서 또는 혈연적으로 가깝다고 해서 이웃이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뜻은 오늘 제1독서 아모스서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여기에서도 이스라엘 왕국의 궁중예언자인 아마지야와 농부출신인 아모스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에 전하자, 왕실의 예언자 아마지야는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당장 여기를 떠나 유다나라로 사라져라. 거기 가서나 예언자 노릇을 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다시는 하느님을 팔아 베델에서 입을 열지 마라. 여기는 왕의 성소요 왕실성전이다.(아모 7:12-13)”

이에 아모스는 자신은 원래 평범한 목자요, 농부였는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이끌리어 주님의 메신저가 되었노라고 합니다. 아마도 체계적인 교리와 율법, 신학공부를 한 아마지야가 볼 때, 아모스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투박하고 서투른 시골뜨기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예언행동은 후대에 어떻게 판단 받았습니까? 아모스야말로 진실한 예언자로 평가받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아모스 예언자 역시 사마리아 사람의 역설을 보여준 전형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아모스 예언자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은 우리를 보실 때 외형적인 조건보다 우리 안에 있는 양심과 내적인 모습을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이 영역은 오직 나와 하느님 밖에 알 수 없는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내 내면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늘 솔직하게 열면서 주님의 은총으로 거룩해지도록 기도하며 덕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지식은 실천과 연결되어야 진정한 지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신앙체험이 없는 신학이론, 인생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학문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과 학문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인간의 존엄성, 자연의 위대함 더 나아가 하느님의 거룩함 앞에 겸손해 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강도들로부터 공격받아 상처받아 쓰러져 있는 내 이웃과 각종 피조물들을 보듬어 안고 살릴 수 있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더불어, 곧 열릴 세계 성공회 주교회의 역시 이러한 마음으로 성령의 부르심에 겸손되이 응답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참된 이웃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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