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주님의 식탁, 우리의 식탁(다해 연중22주일)
작성일 : 2022-08-28       클릭 : 20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828 다해 연중22주일

예레 2:4-13 / 히브 13:8, 15-16 / 루가 14:1, 7-14

 

 

 

주님의 식탁, 우리의 식탁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식사하기 전,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를 합니다. 이 관습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다인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평소 식사 전에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절기에는 온 가족이 모여 특별한 식사예배를 드립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유월절(逾越節)이라고도 번역하고, 과월절(過越節)이라고도 번역하는 파스카(Pascha)축일에 오늘날 우리 예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식탁예식을 합니다. 이 파스카 예식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준비된 식사가 차려지고 모두 식탁에 모인 자리에서 아이들이 어른들께 오늘 밤은 왜 다른 모든 밤과 다른가요?”, “이 날 식사는 다른 날 하는 식사와 달리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집안의 가장은 오래전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마치고 그들은 쓴맛이 나는 풀,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 그리고 양고기를 먹습니다. 여기서 쓴 맛이 나는 풀은 쓰라린 노예생활과 광야에서 지냈던 시절을,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은 빵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릴 새도 없이 황급히 이집트를 빠져나와야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적에게 달아나기 전 급히 음식을 먹는 도망자처럼 양고기를 먹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식탁에서 조상들이 겪은 일을 기리고 기념하는 식사를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 구원의 사건을 현재에서 시연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과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이 식사예식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자리에서 제자들에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나눠주시면서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시고, 잔을 들어 감사기도를 하신 후 그들에게 돌리시면서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어권에서는 우리 예배를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라고 칭합니다. 또한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이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빵과 포도주를 먹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었기에 이 예식을 거룩한 친교(Holy Communion)’이라고 부릅니다. 초기교회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지중해로 전파되면서 이 예식을 그리스어 감사하다(εχαριστέω)’의 명사형인 에우카리스티아(εχαριστία)’로 불렀습니다. 오늘날 대한성공회는 초창기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이 명칭을 채택해서 공식적으로는 감사성찬례(The Eucharist)’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133년 전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전래되었을 때, 영국 선교사들은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미사(Missa)'라는 명칭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라틴말로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 문화권에서 넘어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널리 사용된 말입니다. 이 용어는 회중들이 모임을 마치고 해산할 때 사용했던 말, “집회가 끝났소. 가시오(Ite, Missa est)”를 우리전례에 도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마지막 순서에 미사가 끝났으니 가십시오혹은 세상으로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등으로 의미가 확장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전례에서 주님의 성찬이 지닌 다양한 이름들, 주의 만찬, 거룩한 친교, 감사성찬례, 미사 등은 주님의 식사가 지닌 다양하고 풍요로운 면을 드러내 줍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식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식사의 두 가지 정신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환대이고, 다른 하나는 겸손입니다. 먼저, 식사는 환대하는 자리입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습니다.(히브 13:2)” 히브리서의 이 구절을 읽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한창 더운 날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다가 사람 셋이 자기 집으로 오는 것을 보고 집으로 초대해 정성껏 대접하였습니다. 나그네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년 봄에 늙은 사라가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하면서 축복의 예언을 하였고, 과연 나그네들의 말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느님의 천사이자, 훗날 그리스도교에선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식사는 배척하는 자세가 아닌, 환대하는 열린 태도를 가집니다. 그럴 때 하느님은 우리도 예상치 못한 축복의 통로를 열어주십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식사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광경을 보시고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루가 14:8)”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윗자리에 앉았다가 더 높은 사람이 와서 자리를 내주는 무안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차라리 맨 끝에 앉아야 윗자리로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간단한 생활의 지혜를 말씀하시지만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11)”라는 삶의 철학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고대 중국 노자의 도덕경(道德經)과 일맥상통합니다. 도덕경 8장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 뛰어나지만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예수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동양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물과 같이 되어라! 그것이 최고의 선이며, 그것이 바로 도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윗자리만 차지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시선과 마음은 다른 것을 볼 수도, 품을 수도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협소해지고 옹졸해지게 됩니다. 결국 포용력과 너그러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낮은 자리를, 도덕경에서 말하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경지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모든 이를 품을 수 있고, 모든 이를 살릴 수 있는 대인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의 식사는 소외(疏外)의 자리가 아닌 상생(相生)의 잔치가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그러면 너는 행복하다. 그들은 갚지 못할 터이지만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루가 14:13-14)”

하느님은 말구유간에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이 겸손의 도를 통해 모든 것을 살리고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의 만찬, 거룩한 친교, 감사성찬례, 미사라고 부르는 우리의 예배는 이 지극한 겸손의 도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이 자리에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 사람이 그가 성공회 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장로교인 이든, 감리교인이든을 불문하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봉헌하신 예수님의 빵과 포도주를 함께 먹고 마시는 거룩한 잔치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성공회는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형제자매들을 환대하며 예수님이 제정하신 감사성찬례를 함께 기념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매 주일 모이는 이 예배는 이처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면 먼 옛날 출애굽 사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공간적으로 보면 어느 지역도 소외하지 않는 환대의 잔치입니다. 이제 이 거룩한 예배는 일요일 이 시간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예배를 마치면서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 이 정신을 증언하고 실천하라는 사명을 받습니다. 우리가 미사라고 부르는 이 말 속에 바로 그 사명이 담겨있습니다. 그 사명은 우선 우리 가족이 먹는 식사에서부터 시작합시다. 음식을 앞에 놓고 함께 기도하고 즐겁게 식사하면서 우리는 행복과 즐거움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가족들 간에 소통(communion)이 이루어집니다. 나아가 우리가 세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먹고 마시는 자리에까지 확장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식탁과 우리의 식탁은 동떨어지지 않고 연결됩니다. 그 속에서 성령의 임재가 이 거룩한 공간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임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교적 삶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셔서 생명의 양식을 주시고 다시 세상으로 파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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