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진복팔단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3요소(다해 연중4주일)
작성일 : 2023-01-29       클릭 : 16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129 다해 연중4주일

미가 6:1-8 / 1고린 1:18-31 / 마태 5:1-12

 

 

진복팔단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3요소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진복팔단(眞福八端)’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진복팔단이란 ‘8가지 참된 복또는 ‘8가지 참된 행복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8가지란 가난함,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정결, 평화, 의로움 때문에 핍박받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참 행복하고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진복팔단 선언은 마르코와 요한복음에는 없고, 마태오와 루가복음에만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을 모은 어록집에서 가져 온 거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마태오와 루가가 자신이 속한 교회실정에 맞춰서 약간의 편집을 한 것입니다. 그 차이점을 보자면, 우선 장소가 서로 다릅니다. 루가는 예수께서 평지에서 설교하셨다고 하고, 마태오는 산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 5장부터 7장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는데, 진복팔단은 산 위에서 군중들에게 설교하신 산상수훈 중 일부로 편집되었습니다. 이것은 마태오가 속한 교회 구성원들 대부분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전에 유대교 신자들이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알려준 것처럼, 예수님도 산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하시는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십계명보다 더 보편적인 계명을 계시하신 분으로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복팔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모세의 십계명 못지않게 중요한 종교적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진복팔단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맨 먼저 첫 번째 가난한 사람과 두 번째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이 처한 불우한 환경이고, 슬픔은 그러한 환경에 대한 인간의 감정인데 모두다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가복음은 가난을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마태오 복음은 좀 더 영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지 않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좀 더 정확한 번역은 ()’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태오의 관점에서 볼 때,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아직 이루지 못한 탐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추구하는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닌 오직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역시 단지 심성이 착한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앙과 영성적 차원을 지닙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단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악의와 적대감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를 이루는 적극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지 박해받는다고 해서 다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그 원인이 의로움을 추구하다가 박해받는 자라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럼 예수님은 왜 일반적인 가치와 반대되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눈을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묶어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선 이것을 종말론적 선취(先取)’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을 미래의 희망, 더 근원적으로는 마지막 때에 올 영원한 하느님나라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어려움을 초극(超克)하라는 주님의 초대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행복하다’, ‘기뻐하라’, ‘즐거워하여라라고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단순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인간의 행복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 인정받는 궁극적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그 행복은 참된 복(眞福)’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쉬운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적당히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서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양 몇 천 마리 바치면 야훼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거역하기만 하던 죄를 벗으려면 맏아들이라도 바쳐야 합니까?(미가 6:7)”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경신례와 전례만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현재생활을 정당화하고자 합니다. 이에 반하여 미가 예언자는 하느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럽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미가 6:8)”이라고 일갈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에 있는 이 구절을 달리 표현하자면, ‘정의, 사랑, 겸손한 신앙입니다. 미가 예언자가 지적한 이 세 가지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 영성의 3가지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정의, 사랑, 신앙이 빠진 전례는 공허한 예식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진복팔단을 요약할 수 있다면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이치입니다.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멸망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18, 25)”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2000년 전 사도 바울이 고린토 시에서 교회를 세웠을 때 상황을 회상해 봅시다. 당시 고린토는 부유한 상업도시였습니다. 항구를 통해 물류가 유통되면서 고린토의 유행에 따라 산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사치와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막대한 부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하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그 도시에서 검소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또한 마태오가 속한 교회는 주변에 다수를 이루고 있는 로마인, 그리스인들의 이민족 속에 소수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로부터 몰이해와 심지어 박해도 견디어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둘 다 모두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신자들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포기하고픈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설파하신 진복팔단의 가치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굳게 신뢰하면서 하느님의 정의를 기다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묵묵히 고난의 세월을 이겨냈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교회는 전 세계에 걸쳐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여기 있는 우리도 이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술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하였다고 하지만, 우리시대는 2000년 전 고린토 교회와 마태오가 속한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고 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풍요로운 물질세계 속에서 여전히 경제적으로 팍팍한 살림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보다 더 잘 되기 위해서 정의로운 길보다는 정의롭지 못한 방법을,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시기와 미움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고 참된 하느님 나라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물질과 쾌락의 세상을 더 추구하고픈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을 감고 우리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본다면, 당장의 현세적 가치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줄 수 있는 안전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때 결국 이 세상에서 죽기 살기로 긁어모은 것들을 손에서 모래가 빠지듯 내려놓고 가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나와 이웃을 사랑하고 살았는가, 내가 얼마나 공의롭게 세상을 살았는가, 내가 얼마나 하느님과 함께 걸어왔는가라는 눈에 보이지 않던 가치가 마침내 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를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선 느낄 수만 있을 뿐 결코 보이지 않던 가치이지만, 저 세상에선 하느님을 맞대고 보듯이 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복팔단이 지향하는 종말론적 가치입니다.

모든 교우분들에게 주님이 선언하신 진복팔단의 기쁨이 임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며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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