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십계명과 황금률을 이어주는 십자가(나해 사순3주일)
작성일 : 2024-03-03       클릭 : 65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40303 나해 사순3주일

출애 20:1-17 / 1고린 1:18-25 / 요한 2:13-22

 

 

십계명과 황금률을 이어주는 십자가

 

 

1956년 제작한 십계(The Ten Commandments)’는 미국의 대표적인 종교영화로서 당시 최첨단 기법을 활용하여 제작한 영화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시절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중간에 휴식시간이 있을 정도로 약 4시간에 걸쳐 봤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는 십계명에 대한 내용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봤던 십계에서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 올라간 사이 지상에서 다단(Dathan)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의 선동으로 히브리인들이 황금 송아지를 자신들의 구세주로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와 이 광경을 본 모세가 분노하여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깨자, 하느님의 진노가 내려 잘못된 길로 선동한 자들이 징벌 받아 죽게 되고 백성들은 두려워합니다. 이에 모세가 백성을 대신하여 용서를 빌고 하느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시고 다시 십계명을 기록해 주신 돌판을 건네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십계에 나오는 이 장면은 모두 출애굽기에 근거하고 있는데, 첫번째로 받은 십계명은 오늘 우리가 들은 출애굽기 201절에서 17절까지 말씀이고, 죄를 저지른 일부 사람들이 벌을 받은 후에 모세가 다시 판을 받기 위해 산에 올라가 받은 십계명은 출애굽기 3411절부터 26절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첫번째와 두번째 십계명이 좀 다릅니다. 새로운 십계명은 그 초점이 올바른 경배에 맞춰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두번째 십계명을 의례 십계명(Ritual Decalogue)’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십계명이 생겼을까요? 우리는 성경이 오늘날처럼 어느 한 사람 혹은 한 집단에 의해 단 시간에 쓴 작품이 아니라 길게는 수천년 짧게는 수백 년에 걸쳐 씌어진 것들을 수집하고 편집하여 현재 우리가 보는 모습으로 된 책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두 개의 십계명이 영화 십계에서 보듯이 비교적 짧은 기간과 단일한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전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히브리 민족들이 이집트 탈출에서부터 가나안의 주변민족들과 살아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기나긴 역사의 순례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이 살아온 역사(歷史)를 회고하면서 그들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역사(役事)를 고백하고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두 개의 십계명은 그 목적과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히브리 백성이 이집트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것이라면, 출애굽기 34장의 십계명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계약이 깨지고 백성이 혼란이 일어난 상황 하에서 재계약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거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봤을 때, 두번째 십계명은 히브리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문화에 오염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 다시한번 하느님과 맺은 계약으로 돌아오기 위해 기록된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는 전통적으로 제일 먼저 언급된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을 기독교 윤리의 근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흔히들 기독교를 계약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과 그것을 쌍방이 준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십계명은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일종의 계약조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십계명이란 계약조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첫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갖는 의무가 명시되어 있고, 두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가 지켜야 할 의무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계약조문에 명시된 조항들을 인간들이 준수하면, 계약의 또 다른 당사자인 하느님은 인간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쌍방 중 일방이 언급된 조항을 지키지 못할 때, 계약은 깨지게 됩니다.

유대교의 근간이자 기독교의 중요경전인 구약, 그 중에서도 토라(Tora)라고 부르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법과 규정이 나오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계약의 종교라는 대표적 증거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이 계약이 처음 맺어졌을 때의 상황과 취지가 점차 퇴색되고, 시대를 흐르면서 다양한 상황이 발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법과 규정이 만들어지고 변형되면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며, 이 많은 것들을 관통하는 근본정신이 어떤 건지 파악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 1228절에서 34절까지를 보면,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마르 12:28)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 30-31)라고 압축해서 말씀하십니다. 흔히 이 말씀을 그리스도교에선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계명이라는 뜻으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면에선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구약의 십계명보다 신약의 황금률이 더 근원적인 계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십계명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십계명은 오래 전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맺은 계약이지만, 그 조항이 명시하는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신앙과 윤리의 가치들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와 환전상들의 폭리에 분개하시며 호통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예물을 드릴 때, 사람들은 사회에서 사용하는 돈을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돈으로 바꿔야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환전상들은 비상식적인 폭리를 취했고, 이것의 일부는 환전상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대사제들에게 헌납하는 부당한 거래를 취했습니다. 그 결과, 가난한 사람들은 예물을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모든 이들에게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거룩함을 가로막고 있는 성전의 행태를 다시 원래모습으로 복원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최초로 십계명을 받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타락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고 십계명 판을 깨고 이스라엘 백성의 참회를 거쳐 다시 계약을 맺었듯이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성전의 사제들과 집권층은 예수님을 로마총독에게 반역죄로 모함하여 치욕스러운 극형인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도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제2독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반박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1고린 1:25)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진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역설의 중심에는 바로 십자가의 신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어리석고 창피하다고 평할지 모르나, 우리는 십자가야 말로 참 구원으로 가는 열쇠라고 고백합니다. 만일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이기심에 사로잡혀 황금 송아지를 하느님으로 착각하고 경배할 것이고, 사랑 대신에 미움과 증오로 서로 짓밟으려고 하다가 모두가 망하는 길로 떨어질 것입니다. 오직 진리와 사랑 그리고 정의의 십자가를 추종할 때만이 이기적인 자아가 죽고 성령을 통해 부활한 예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로 성부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 그 당사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사순절도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십계명과 황금률을 이어주는 십자가의 신비를 깨우치고 십자가로 이기적이고 무례한 나를 이기고 참다운 예를 찾으시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기쁨을 누리 시길 바랍니다.

모든 계명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덧글쓰기  

광고성 글이나, 허위사실 유포, 비방글은 사전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베드로 24-03-09 47
다음글 베드로 24-02-25 56


묵상 영성 전례 옮긴글들
이경래 신부 칼럼 김영호 박사 칼럼

홀리로드 커뮤니티

댓글 열전

안녕하세요?선교사님!
정읍시북부노인복지관 멸치 판매..
원주 나눔의집 설명절 선물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