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불뱀과 십자가( 나해 사순4주일)
작성일 : 2024-03-10       클릭 : 3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40310 나해 사순4주일

민수 21:4-9 / 에페 2:1-10 / 요한 3:14-21

 

불뱀과 십자가

 

교통통신기술의 발달로 인해 오늘날 지구 일부 지역에서 병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전세계적으로 병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 해도 사스(SARS)라고 부르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메르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Corona virus) 등 인류는 이제 전염병을 예방하고 확산을 막기위해 국경을 뛰어넘어 전지구적으로 노력해야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1948년 창설된 WHO라고 부르는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보건기구의 로고에는 UN을 상징하는 월계수로 둘러싸인 지구본 위에 뱀이 감긴 지팡이가 있습니다. 언뜻 보면 인류를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국제기구가 왜 뱀을 그들의 상징으로 했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을 겁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뱀을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여 죄에 빠뜨린 동물, 그리고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사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인 불뱀 등으로 들어서 뱀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은 재생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으며, 뱀의 독은 때때로 생명을 구하는 약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의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는 그의 지팡이에 뱀을 감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WHO를 비롯하여 군의관이나 병원에선 지팡이와 뱀을 의술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선 오늘 제1독서에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나을 거라고 하는 것도 어쩌면 다친 사람들이 구리뱀을 표식으로 하는 곳에 가서 치료를 받고 해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불뱀 이야기를 통해 성경 저자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오랜 여정 중에 빈번히 발생한 뱀에 물리는 일들을 보면서 그것을 그들이 겪은 고달픈 삶에 대한 불평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러한 환경으로 인도한 모세와 야훼 하느님에 대한 깊은 불신과 원망으로까지 연결시켰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불뱀에 물리는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그들이 당장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대상도 결국 모세와 하느님 밖에 없었습니다. 참으로 히브리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 그들과 야훼 하느님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질긴 애증(愛憎)의 관계라고나할까요? 반대로 하느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당신 백성들이 대들고 반항했지만, 당장 그들이 죽게 생기게 되자 살려내야 하는 ‘말썽장이 자녀들’이라고나 할 것입니다. 결국, 불뱀 이야기에서 하느님과 백성들과의 관계는 부모자식 같은 하나의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구약의 불뱀 이야기를 오랜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이제 신약의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던 예수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3:14-15)” 그러면 그들은 왜 구약의 구리뱀 상징을 빌어서 십자가 의미를 설명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십자가가 당시 일반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일반인들은 십자가를 극도로 수치스럽고 잔혹한 형벌로 인식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십자가형은 잡범들에게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반역과 반란을 일으킨 자, 가장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만 부여하는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형이란 공개처형을 당하는 죄인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언덕과 같은 장소에 달려서 극심한 고통으로 울부짖는데, 한 밤중에 정적을 깨고 그 단말마적 비명소리를 지를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공포를 자극해서 감히 제국의 통치자에게 반항할 엄두를 못 내게 하는 심리적 효과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대교회 신자들이 전도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것은 엄청난 선교적 장애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셨던 놀라운 기적과 훌륭한 가르침을 듣다 가도, 이 분이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사실에 일반인들은 큰 충격과 공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믿었다가는 자신들도 국가반역죄에 가담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예수가 우리를 구원시키는 분이 아니라 파멸시키는 분은 아닌지 의심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적 어려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1고린 1:22-23)”라고 당시 선교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시대 광야에서 불뱀에 물렸을 때, 구리뱀을 보고 치유받았다는 Tora(모세오경)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십자가의 역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히브리 백성들이 고난의 근원을 잡아 들어올린 구리뱀이라는 표식을 보고 희망함으로써 현실의 아픔을 극복했듯이, 신약의 신앙인들은 고통의 바다속에서 우리가 벗어날 구원은 역설적으로 그 고해의 심연까지 내려갔다가 그것을 뚫고 솟구쳐오른 십자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우리 동양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살게 된다(生卽死 死卽生)”는 뜻과 유사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기에 예수의 부활로 우리는 살게 되었다는 역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교는 궁극적으로 역설의 진리를 믿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계시하는 상징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여기고 피하고 싶은 십자가로써 우리 인간이 겪는 고통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셨고, 그리하여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을 품어 안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좌절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부활로써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가 겪는 그 아픔과 절망 그리고 그 아픔을 전혀 모르시는 저 멀리 초월의 세계에 계신 분이 아니라,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 지 누구보다 가장 잘 공감하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 십자가를 본다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 물려 아파할 때, 불뱀 지팡이를 보고 치유 받았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린다는 희망과 믿음의 징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렇듯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에페 2:5)”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살면서 겪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힘들어 할 때 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내어 그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나라 시민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과 희망입니다.

사순4주일이자 장미주일인 오늘 우리는 고난 속에서 이 희망을 갖고 기쁨을 미리 맛보면서 인생의 고해(苦海)를 힘차게 헤쳐 나갑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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