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여인의 발 씻김, 예수님의 발 씻김(240328 나해 성목요일)
작성일 : 2024-03-28       클릭 : 3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40328 나해 성 목요일

출애 12:1-4, 11-14 / 1고린 11:23-26 / 요한 13:1-17, 31-35

 

여인의 발 씻김, 예수님의 발 씻김

 

 

성삼일(聖三日) 중 첫번째 날인 목요일은 전통적으로 사제들의 생일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날 사제직과 관련한 두 가지 중요한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오전에 주교좌성당에서 거행한 성유축복식이고, 또 하나는 지금하고 있는 성찬제정 예식입니다. 성유축복식 때 주교님은 한 해 동안 각 교회에서 사용할 성유(聖油)를 축복하고, 성직자들은 이것을 나눠 받아서 가지고 옵니다. 세 부분으로 나눠진 길쭉한 막대기 같은 통에 성유를 받아오는데, 각 부분마다 알파벳 약자가 있어서 그 약자에 맞는 성유를 담습니다. 그 세 가지 성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O.C.라고 씌어진 성유는 예비신자 성유 혹은 세례성유(Oleum Catechumenum)입니다. 이 성유는 예전에 구마 성유(Oil of Exorcism)로 알려진 것으로써 구마할 때 사용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세례예식 때 사용하는 기름입니다. 두번째, O.I.라고 표시된 조병성유(Oleum Infirmorum)가 있습니다. 이 성유는 아픈 사람이나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하는 조병예식 때 사용합니다. 세번째, S.C.라고 표시된 카리스마 성유 혹은 성 향유(Sanctum Oleum)가 있습니다. 이 성유는 견진, 성직서품 뿐만 아니라 성당과 제대를 축성할 때도 사용하는 기름입니다. 성유축복식 전례는 또한 주교를 중심으로 모든 사제들이 거룩한 친교(Holy Communion)’를 집행하는 권한을 재확인하고, 친교를 나눈 사제들은 이제 각자의 임지로 돌아가 예수께서 잡히신 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신 것을 기념하는 성찬제정전례를 거행합니다.

방금 들은 복음은 성 목요일 성찬제정 전례 때마다 봉독(奉讀)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탁에서 음식을 드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이라고 부르는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에서 오늘날 기독교 성찬례의 원형인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나누고 기념하는 모습이 묘사된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식사했다는 것만 간단히 서술할 뿐, 공관복음이 언급하지 않은 발 씻어주는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발을 씻어주는 것은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녔던 고대 근동지방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관습으로, 주인집 종이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던 일을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신 것보다 더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고 마신 것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면, 요한복음 저자는 발을 씻어 주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내려와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겸손과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요한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세족례(洗足禮) 장면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여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두 장면을 묵상하고 관상한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마리아와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먼저,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린 여인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선 어떤 여인이라고만 언급했지만, 요한복음에선 그녀가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죽었다가 소생한 라자로와 그의 남매들로서 예수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장차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을 거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큰 충격을 받고, 그 누구보다도 걱정하고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마리아는 다가올 그 운명의 시간 앞에서 사랑하는 예수님을 위해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하고 깊이 고민했을 겁니다. 비록 아픈 오빠를 돌보느라 집안이 가난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던 돈 삼백 데나리온으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사서 식사하러 집에 오신 예수님 발치에 가서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많은 성서학자와 신학자들은 다양한 해석과 신학적 해설을 하고 있지만, 저는 다른 남성제자들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과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권력 등을 기대한 것과 달리, 그녀는 그저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는 분이 어쩌면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슬픔, 그리고 그러한 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행한 거라고 느낍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닦으신 예수님을 보겠습니다. 히브리백성이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과월절 축제를 앞두고,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은 이제 이 세상을 벗어나 성부 하느님께로 가실 때를 아시고, 당신과 함께 했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더욱 극진히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다른 성경에는 끝까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말씀 뿐만 아니라 이제 발을 닦아주는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둘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을 때 가롯 유다는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요한 12:5)라고 비판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고, 이것을 5만원으로 해서 환산한다면 1,500만원이나 되는 돈입니다. 지금으로 봐도 큰 돈입니다. 그의 말대로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면, 더 효과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 말에 동의했을 겁니다. 한편, 예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 주시려 하자, 베드로는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요한 13:8)라고 사양합니다. 왜 제자들은 이런 말과 행동을 했을까요? 제자들의 생각과 태도는 어쩌면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1,500만원이나 되는 돈을 어떤 사람의 발에다 쏟아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또한 발을 닦는 그런 일은 아랫사람이나 하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세상 일을 양적으로만 그리고 신분이라는 위계질서 속에서만 판단한다면, 지구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광대한 우주 그리고 하느님이라는 최상의 존재가 가장 작은 별 지구 그리고 그 속에서 당시 가장 별 볼일 없는 식민지 백성 이스라엘에 오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바쳐 희생하신 그 일과 그 의미를 영영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발 씻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하는 예수님이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야망과 욕망이 투영된 상태에서 예수를 따랐다면, 그녀는 그저 예수님 자체를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자가 곧 수난을 받을 거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에 반해, 그녀는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주님의 고난을 감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예수님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제자들과 이별할 것을 아셨기에, 최후의 만찬과 발 씻김으로 그들에게 마지막 모범을 남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평소처럼 특별한 기적으로 유언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마시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그리고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겸손과 사랑의 행동을 통해 거룩하고 위대한 유산을 남겨 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함께 먹고, 서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행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성체제정 예식을 마치면 교회는 예수님이 가신 가장 고통스러운 어둠의 길을 기념하고 기도합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가신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함께 걸으며 그분의 수난에 동참합시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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