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기이한 결말(나해 부활대축일)
작성일 : 2024-04-07       클릭 : 1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40331 나해 부활대축일

이사 25:6-9 / 사도 10:34-43 / 마르 16:1-8

 

기이한 결말

 

 

지난 주일부터 이번 주일까지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중 핵심인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집중해서 기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성삼일(聖三日)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이 날들이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일 피정을 하고 싶지만 바쁜 일상 때문에 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교회는 성삼일을 포함하여 오늘 부활대축일까지 전례에 참여하기를 권합니다. 최소한 이 기간 전례에 성실히 참여하는 신자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깨닫는 영적선물을 받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마르코 복음을 전례독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마르코 복음 저자가 증언한 예수님의 행적을 듣고 기도합니다. 지난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마르코 복음서의 상징은 사자입니다.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마치 초원의 왕 사자가 대지를 흔들듯이 포효합니다. 마르코 복음 1 1절에서부터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 이라는 말씀으로 복음서 저자는 세상을 향하여 대담하게 선언합니다. 그가 선언하는 세상은 아담과 이브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들도 신처럼 무소불위의 권능을 휘두르고 싶어 하다가 흙으로 돌아가 버린 이후, 인류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권력에 대한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이 빚어낸 온갖 투쟁과 전쟁이라는 어두운 현실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러한 세상은 뒤집어져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εαγγέλιο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게 그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하실 때, 온갖 유혹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유혹이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사순1주일 설교에서 저는 이것을 동양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인생의 네가지 덫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네가지 덫이란 ‘(), (), (), ()입니다. 이 중에서 재()는 먹는 것을 포함한 우리의 물질적 자산을 추구하는 욕구이고, ()은 종족번식과 육체적 쾌락을 얻으려는 욕구입니다. 이 두 개는 기본적으로 우리 육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명()과 위()는 명예와 지위를 확보하려는 욕구, 달리 표현하면 권력에 대한 욕망이며 우리 정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들 욕구 중에서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가장 근원적인 욕망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은 세월이 흐르면 노쇠하고, 배부르면 그 이상 먹기 힘든 반면에, 우리 정신은 무한한 것을 동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최초의 첫 인류가 범한 원죄가 바로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 즉 권력욕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마귀가 예수께 한 3가지 유혹 중 마지막이 권력의 유혹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께 천하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보여준 뒤, 자신한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러자 세상과 그 영적 지배자들은 예수님이 모으신 제자들의 욕망을 부채질합니다.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마르 10:37)라고 청하며 자신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리고 가롯 유다는 스승을 팔아서 삐뚤어진 권력의 욕심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과 예수님의 영적전쟁은 참으로 치열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권력의 욕심으로 병든 이 세상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십자가라는 가장 낮고, 가장 역설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을 분쇄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코가 전한 예수님의 부활은 또다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듭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오늘 읽은 복음까지 마르코 복음이 끝난다고 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덧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들은 내용이 마르코 복음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원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읽은 복음의 의미를 하나씩 짚어 나갑시다.   

먼저,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여인들을 봅시다. 스승 예수를 통해 한자리에 앉길 기대했다가 도망쳐 버린 제자들과 달리, 그녀들은 존경하고 따랐던 분이 비참하게 죽은 것에 애통해 하며, 그 분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해 드리려 갑니다. 남자제자들에 비해 권력에 대한 부정한 동기가 없는 그녀들은 존경하던 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죽었지만 여전히 감시를 받았던 그분의 무덤으로 가려는 그녀들은 어떤 면에선 용기 있는 여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녀들이 본 광경을 봅시다. 그녀들의 걱정과 달리, 돌은 치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거기엔 예수의 시신은 없고, 웬 흰 옷 입은 젊은이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선 이 사람을 천사라고 하고 있고, 루가 복음에선 두 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선 이 젊은이가 아예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이 중 가장 먼저 집필된 복음이 마르코 복음이고, 그래서 후에 씌어진 복음서는 이 젊은이에 대하여 약간의 해석이 덧붙여진 것 같습니다. 그가 정말 인간인지 아니면 천사인지 따지기 전에, 마르코 복음 저자는 그 젊은이의 말을 빌려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겁내지 마라’. 둘째,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살아나셔서 여기 계시지 않는다.’ 셋째,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너희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분을 만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겁내지 마라는 말은 인간이 초월과 거룩함의 영역을 접할 때 나오는 반응과 연결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낯선 사람, 낯선 물건, 낯선 곳과 접할 때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일종의 자기보호본능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을 접할 때, 인간은 죽을 것만 같은 극도의 공포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은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곧 나의 죽음이 왔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을 체험하는 것도 일종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공포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 즉, 참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것과 같은 영적이고 초월적인 분과 만나는 인사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여기 계시지 않는다라는 말로써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듭니다. 비록 그분이 죽었어도 사람들은 그분을 놓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는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했던 그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마르코 복음저자는 빈 무덤을 통해서 우리에게 욕망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비우라고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무덤 속에만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갈릴래아로 가서 그분을 만나라라는 메시지를 통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갈릴래아가 어떤 곳입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갈릴래아는 고향이자, 예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꿈을 함께 꾸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꿈은 십자가 사건을 거치면서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음이 폭로되었습니다. 그 폭로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나라를 위해 꿈꾸고 일하자고 초대하십니다. 이것이 부활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의 반응을 봅시다. 여인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두려워하지 마라고 했더라도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트라우마와도 같은 사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트라우마는 거룩한 트라우마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신선하고 놀랍고 그래서 기쁜 영감이 끊임없이 분출되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아마도 그 일을 반추하면서 점점 깊이 깨달았고, 그래서 마침내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야생에서 사자를 보고 놀랐지만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사자를 봤다는 경이로움에 흥분하듯이 말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며칠 있으면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우리 서울교구도 주교선거가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인물이 나오면 어떤 변화가 옵니다. 그 변화가 우리가 늘 달고 다니는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별 새로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언급했던 차원이라면, 우리에게 그것은 복음(福音)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갈릴래아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사회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 나라를 좀 더 닮도록 기도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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