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어떤 목자를 기억하며(나해 부활4주일)
작성일 : 2024-04-20       클릭 : 19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40421 나해 부활4주일

사도 4:5-12 / 1요한 3:16-24 / 요한 10:11-18

 

어떤 목자를 기억하며

 

 

성공회와 천주교의 주교는 전례 때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잡습니다. 영어로 마이터(mitre)라고 부르는 주교관은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알려주신 구원의 진리를 수호함을 의미하고, 양떼를 이끄는 목자의 지팡이에서 유래된 ‘주교 지팡이(bishop’s staff)’는 우리 전례서에는 성장(聖杖)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제들과 신자들을 돌봐야 함을 상징합니다. 성공회 기도서에 있는 전례예식에는 주교 서품식 때 주교관을 쓰고, 이어서 진행하는 교구장 승좌식에선 전임 교구장 주교가 신임 교구장 주교에게 치리권을 이양하는 상징으로 성장을 건네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팡이를 목자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유목문화에서 영향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노래한 시편 23편은 장례예식 때 성가 294주님 나의 목자라는 노래로 부를 정도로 사랑받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시편 23편을 기도할 때 우리는 목자가 자신의 양을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듯이, 주님도 나를 그렇게 좋은 곳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나를 위해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 부어 축복하실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을 얻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목자 이미지가 이제 신약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착한 목자로 묘사하십니다. 그러면 착한 목자란 어떤 존재입니까? 오늘 복음말씀에 근거하여 저는 4가지 특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삯꾼은 이리가 가까이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지만,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말씀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으로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바로 착한 목자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스승 예수를 따라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고, 안드레 사도는 X자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모두 착한 목자의 길을 걸으신 분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니케아 신경에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교회라는 기도를 드릴 때, 그 안에는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예수님과 그 길을 따라 걸은 사도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삯꾼이 아니라 착한 목자의 길을 기꺼이 가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전에 신학교 교수신부님한테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조선에 온 천주교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에피스코푸스(episcopus), 영어로 비숍(bishop)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독(監督)과 주교(主敎)라는 두 번역어 중 하나를 선택할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신자들이 주교가 낫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박해를 받고 있어서 주교라는 말이 죽여라고 들려서 주교는 신앙을 지키고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제일 앞장서 죽는 사람이라고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야사(野史)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일리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둘째, 착한 목자는 싸우는 자입니다. 싸운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악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위해 증언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리가 양들을 덮칠 때 착한 목자는 용감히 맞선다고 합니다. 오늘 1독서 사도행전에서도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가 앉은뱅이를 낫게 하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끌려갔을 때,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협에 맞서서 용감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순교자를 성인들 중 제일 으뜸으로 존경합니다. 그 이유는 순교자(martyr)란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증언자(witness)이기 때문입니다. 주교관(mitre)을 쓴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순교의 전통과 증언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실로 막중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착한 목자는 소통하는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한10: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가 일치를 이루는 소통을 모범삼아 주교는 사제와 신자들과 그렇게 친교와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친교와 소통을 하는 내적 에너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제2독서인 요한의 첫째 편지에서 요한사도는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1요한 3:17, 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착한 목자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양들과 소통하는 자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목장은 푸른 풀밭이 됩니다.

넷째, 착한 목자는 선교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요한 10:16)우리가 주교님을 포함하여 사제들의 직무를 사목(司牧) 혹은 목회(牧會)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언어로 풀어본다면, 일종의 관리(management)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라는 울타리에 있는 양들을 살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발 더 나아가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착한 목자는 선교사(missionary)이기도 하며, 2000년 교회역사는 선교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 강화성당도 이러한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기초가 놓인 곳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착한 목자의 네가지 특성에 대해 숙고하며 설교를 준비를 할 때, 저는 우리 대한성공회 주교님들 중에서 두 분의 목자가 떠올랐습니다. 한 분은 대한성공회 4대 교구장이신 구 세실(Alfred Cecil Cooper 1883-1974)주교님이고, 다른 한 분은 5대 교구장이자 초대 대전 교구장이신 고 요한(John Daly 1911-1993)주교님입니다.

구 세실 주교님이 교구장 주교로 재직했던 1931년부터 1954년은 우리나라가 가장 고통이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일제는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을 내려 교회가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해방 후 얼마 있다가 발발한 한국전쟁은 다시 일어서려는 우리민족과 성공회를 또 한 번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트렸습니다. 이 시기 적지 않은 한국인, 영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구세실 주교도 이 때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추운 겨울 압록강 중류지방 중강진까지 죽음의 행진(Death March)’을 걸었습니다. 그 와중에 헌트 신부님과 마리아 클라라 수녀님이 사망했고, 세실 주교님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포로송환으로 런던을 거쳐 1953 11월 불사조처럼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구 세실 주교님은 우리민족과 우리 교회의 고통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구 세실 주교님에 이어서 5대 교구장이 되신 고요한 주교님은 전쟁으로 폐허 된 우리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캔터베리 대주교님의 명으로 파견되어 오신 선교사 주교님이셨습니다. 이 분은 선교사 주교님 답게 대한성공회가 자신들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끌어갈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서울 항동에 부지를 마련해서 신학교를 재건하고, 인재를 선발해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대전교구를 분할해서 영국에서 독립하여 하나의 관구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셨습니다. 특별히, 이분은 어렵고 힘든 이들에 대한 연민이 많으셨는데 그 중 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1955년 겨울 얼어 죽어가는 거지소년들을 대성당에 데려와서 보금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데리고 있던 거지소년들이 사라져 버리자 그들을 찾으러 나섰습니다. 수소문 끝에 강원도 황지로 끌려갔을 거라는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원도 탄광촌의 사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대한성공회 사회선교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고요한 주교님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난 10일 국회의원선거와 13일 서울교구 주교선거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배에서 착한 목자에 대한 성경말씀을 들었습니다. 선거의 속성상 최다득표자를 대표로 선출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착한 목자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불의와 거짓에 맞서서 정의와 진리를 지키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가운데, 현상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평을 확장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실로 막중한 자리입니다.

이제 새로운 국민의 대표와 서울교구의 차기 목자가 그 정신을 잊지 말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힘을 모아서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가 시편23편이 노래하는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아름다운 집이 되길 소망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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