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302 하느님의 변모는 인간과 세상을 변모시킨다(다해 주의 변모축일)
작성일 : 2025-03-02       클릭 : 59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302 다해 주의 변모축일

출애 34:29-35 / 2고린 3:12-4:2 / 루가 9:28-43

 

하느님의 변모는 인간과 세상을 변모시킨다

 

현대서양철학자 중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uel Levinas 1906~1995)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가 살았던 20세기에 인류는 두 차례 세계대전이란 커다란 비극을 겪었습니다. 특별히, 유럽인 그중에서도 유태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 수용소에 갇히고, 가스실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유태인인 레비나스는 이러한 불행한 시대 상황 속에서 당시 주류를 이루던 자아중심적이고 전체성을 강조하는 주류 서양철학을 반성하였습니다. 그러한 사색의 결과, 그는 타자성의 철학또는 평화의 철학을 대안으로 제시하였습니다. 레비나스는 전통 철학에서 논하고 있는 자아(ego)를 기반으로 하는 주체(主體)’라는 개념을 타인을 받아들임으로 보완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란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면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특별히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와 책임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 타인을 인식하고 타인과 연대하는 출발점은 무엇인가요? 레비나스에 따르면, 그것은 타인의 얼굴을 알아봄에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얼굴은 사물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얼굴은 코와 입, 눈으로 이루어지지만, 이는 판자와 서랍, 책상다리가 모여 책상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책상은 바라보지도 않고 호소하지도 않고 스스로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를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얼굴과의 만남은 사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특별히, 곤궁과 무력함을 띤 타인의 얼굴과 대면할 때, 나는 나의 자유, 나의 자기실현을 그대로 무한정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이를 통해 나라는 개별적 인간성은 우리라는 보편적 인간성으로 열리게 됩니다. 이처럼 레비나스는 얼굴, 특별히 타자의 얼굴을 통해 나와 너의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꿈꿨습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주의 변모축일입니다. 그래서 독서에서는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얼굴이 달라짐을,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달라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출애굽에 나오는 모세의 변모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들은 독서에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증거판을 가지고 내려왔는데, 그의 얼굴이 너무 환하게 빛나서 아론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쳐다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너울로 모세의 얼굴을 가리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오늘 독서에서 모세가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증거판을 받아 가지고 온 것은 처음이 아니라 두번째였습니다. 출애굽기 1920절을 보면, 야훼께서 시나이 산 봉우리에 내려오셔서 모세에게 산봉우리로 오르리고 하자 모세가 올라갔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건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처음에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과 그 밖에 다양한 규정들을 듣고 있을 때,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그가 내려오지 않자,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하느님으로 숭배했습니다. 그러자 산에서 내려와 그 광경을 본 모세는 계약을 위반한 백성들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그 표시로 증거판을 깼습니다. 그 때 모세의 얼굴은 평상시 일반인들의 얼굴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재계약을 하러 두 번째 산에 올랐을 때, 모세의 얼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얼굴과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산하여 그들 가운데 왔을 때, 그들은 감히 모세를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오늘 들은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출애굽기의 이 대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영적인 해석을 합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너울에 가려져서 우둔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갈 때에 비로소 벗겨지게 됩니다.(1고린 3:14, 16)” 사도 바울은 모세의 얼굴을 가렸던 너울을 하느님을 못 알아보는 인간의 우둔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영적 해석을 바탕으로 저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봤습니다. 너울이 인간의 우둔함을 상징하는 것 외에, 다른 상징이 또 뭐가 있을까? 하느님의 얼굴을 닮아 환하게 빛나는 모세의 얼굴과 계약 파기를 식은 죽 먹기로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얼굴 사이에 가로놓인 이 너울의 역할은 무엇일까? 저는 이 너울이 어쩌면 가면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인격이라고 칭하는 영어 말은 personality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persona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페르소나란 고대 로마에서 연극을 할 때 배우들이 쓰는 가면을 가르켰습니다. 배우들은 페르소나를 쓰고 연극에서 특정한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그러므로 페르소나란 가면, 역할을 의미하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 1875~1961)은 페르소나를 개인이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심리학 용어로 사용했습니다. 다만, 페르소나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겉으로 드러나 사회적 인격이라면, 퍼스날러티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 성품까지도 포괄한다는 면에서 양자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출애굽기에 나타난 모세가 백성들과 만날 때 너울로 가렸다는 것은 모세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모습, 다시 말해 하느님과 만나서 하느님을 닮게 된 거룩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죄에 물든 백성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너울이라는 일정 정도 현실에 맞출 수밖에 없는 완충작용을 한 가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완전하게나마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었고, 사도 바울은 구약의 이러한 불완전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극복될 수 있다고 설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본모습을 본다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얼굴을 드러내셨을 때, 제자들이 보인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성서에는 그 차이점이 잘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마르코 복음에는 단순히 예수님의 모습이 변했다(마르 9:2 참조)”라고 묘사하는 반면에, 루가 복음 929절은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얼굴 모습이 변했다(As he was praying the apperance of his face change)”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 마르코 복음에 비해서 루가복음이 기도와 얼굴의 변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변모를 목격한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거기에 그대로 머물고 싶어 합니다. 성서는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변화의 내적인 의미를 아직 깨닫진 못했지만, 신비한 광경 그 자체에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그 광경이 발하는 놀라움과 편안함에 제자들이 푹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 행복한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감정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오늘 복음 후반부는 산 위에서 벌어진 광경과 정반대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는 장면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필경 치유의 능력이 뛰어나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제자들이니까 어느 정도 그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 보고, 제자들에게 아이를 고쳐 달라고 부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치유하지 못했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직접 나서고 나서야 치유가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설교 서두에서 저는 타인의 얼굴은 우리가 관계 맺고 연대하는 시작점이라는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철학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관계 맺음이 불완전할 때가 있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너울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울은 상대의 진짜 얼굴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본래 모습을 봤지만, 그들은 아직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그 모습에 황홀해하며 영원히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한 불완전한 모습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못하였고, 제자들은 악령 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하고 쩔쩔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불완전함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것은 기도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만나서 하느님으로부터 증거판을 받기 위해 40일 동안 시나이산에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타볼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이처럼 우리를 변모케 합니다. 기도는 단지 우리의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우리의 겉모습과 사회적 가면을 변하게 하는 것을 넘어서 나의 진정한 내면을 변모케 합니다.

오늘날 사회는 외적인 것들을 중시합니다. 나의 겉모습, 내가 갖고 있는 부와 지위가 곧 나와 등치(等値)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너울일 뿐입니다. 심지어 참된 진리를 찾아야 하는 교회마저도 세상의 이치에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멋진 캐석과 성직자복을 입었다고 그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처럼 기도하는 사람이어야만, 하느님의 얼굴을 닮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사람이어야만, 세상 한 가운데서 벌어지고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대면하고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예수님의 제자라는 타이틀은 단지 페르소나, 즉 가면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거룩한 모습과 대면하고 그 뜻을 치열하게 알아가고 추종할 때,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의 얼굴을 닮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은 나의 얼굴을 통하여 이웃의 얼굴을 변모케 하실 것이고, 마침내 세상의 얼굴을 변모케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존재이유(Raison d'êtr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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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댓글 열전
안타깝습니다. 저작권때문에 홀리로드의 성가 페이지도 기능이 중단되었습니다. 성가조차도 인터넷으로 마음껏 이용 할 수 없다는 것이 참 답답합니다.
링크가 안되네요 ㅠㅠ
홀리로드 교회주소록에 등록되었습니다. 성공회소개 > 교회기관주소록에서 검색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번호와 교회 위치 수정되었습니다. 혹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글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답변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현재 연동 교회 홈페이지 제작 지원을 중지한 상태입니다. 추후 여력이 되면 또 할 계획입니다만 좀 시간이 많이 걸릴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제작 운영하는 곳이다보니 기복이 좀 심합니다. 이점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현재 캐나다에 체류중이어서 전화 통화는 안됩니다. 궁금하신 사항은 메일(wisetree93@naver.com)이나 게시판에 문의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선교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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