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15 성삼위일체대축일 잠언 8:1-4, 22-31 / 로마 5:1-5 / 요한 16:12-15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기념하며 올해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지 17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 때 드리는 니케아
신경,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기독교의
핵심인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역사적 회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성공회, 천주교, 감리교, 장로교 등이 속해 있는 서방교회와 그리스와 러시아에 기반을 둔 동방교회가 부활절을 같은 날에 드리면서 동•서방교회
모두의 기초가 되는 니케아 신경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된 니케아 신경이 나온 역사적 배경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대한 자유를 선언하였습니다. 그 후, 380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삼위일체 대축일은 이 기간에 열렸던 두 번의 공의회에서 확정된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황제의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된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313년 종교자유가 선언되어 박해가 공식적으로 중단되었지만, 황제가 로마제국 내 모든 주교들을 니케아로 오라고 했을 때, 혹시
다른 구실로 주교들을 체포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국 각 지역에서 318명의 주교들이 니케아로 왔을 때, 이들은 어떤 면에선 순교를
각오하고 모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황제의 말은 곧 법이었기 때문에 황제가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구실로 그것을 철회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긴장감 속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한 분 하느님이라는 기독교만의 고유한 신론(神論)을 정립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예배 때 하는 니케아 신경은 바로 이러한 시대배경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무런
신변의 위협을 받지 않고 니케아 신경을 고백하지만, 300년이 넘는 초기교회 역사, 그리고 니케아 공의회에 모인 318명의 주교들에겐 이것은 순교를
각오하고 만든 비장한 신앙선언인 것입니다. 그러면 니케아 신경을 정립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부들이 치열하게 논의했던 것들은 무엇인가요? 첫째,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통일된 신앙입니다. 당시 예수님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 믿음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지극히 위대하신 분이지만, 성부 하느님과 동일한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리우스 주교를 중심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의 견해를 따르자면, 기독교는 삼위일체가 아닌 유대교처럼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니케아 신경은 바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하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채택된 신앙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사실, 니케아
공의회보다 훨씬 이전 초기교회에 이미 나타난 신앙입니다. 대표적으로 마태오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28:19)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처음부터 믿어왔고,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축복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하신 하느님이라는 신조는 인간이었다가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으로 비로소 신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체험한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는 이 예수가 사실은 태초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로 하신 성자 하느님이었다는 신앙적 깨달음을 신조화한 것입니다. 둘째, 유일신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특징입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이 여러 신들 중 하나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존재, 하나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이신 하느님의 절대성과 초월성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더불어 무한하고 절대적인 존재인 하느님이 유한하고 상대적인 존재 안으로 오신
것도 믿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육화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가 겪고 있는 갖가지 유혹과 고난과 한계를 함께 겪으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당신 안에 품으시고 그 죄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과 인간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하나로 연결시키시고, 마침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느님인 것처럼 인간도 이러한 하느님과 일치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단지 하느님에 대한 진술뿐만 아니라, 이
하느님이 우리 인간 그리고 이 세상과 하나되기 위해 일하시는 구원의 신앙도 포함됩니다. 셋째, 니케아 공의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교리적 신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교회 역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가 몇 백 년 동안
로마제국의 박해를 견디는 동안 지역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각기 다양한 견해와 해석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은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릴 정도로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신경은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公)교회”라는
신조를 명문화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을 증거하는 교회 역시 이와 같이 되기를 힘썼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에는 다양한 생각과 주장들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는 온갖 이해관계들로 인해 혼란과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신을 예수님과 같은 ‘제2의 구세주’라고 하면서 신자들을 거짓종교로 빠뜨리고 있습니다. 또한 물질이 고도로 발전한 세속사회는 하느님 없이도 ‘인간’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순수한 영이신 성령이 주시는 기쁨보다 쾌락을 우선시하도록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기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느님과 유대가 강해질 때만이 우리의 몸 역시 순수한 영적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이루신 분입니다. 사실, 인간이 타락한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제한했기에, 즉 자신
스스로가 이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물질을 영에 종속시키려 했지만, 인간의 영은 약하고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죽음으로 끝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처럼 성부 하느님과 인간의 유대가 약해졌을 때, ‘성령’을 통해 ‘성부’와 완전히 결합하신 ‘성자’가
인간이 되어 자신이 ‘아버지’와 맺은 유대를 인류와 나누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성부와 성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를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으며, ‘아들’을 우리 형제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성자를 같은 ‘아버지’로
둔 형제자매로서 사랑하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우리의 형제가 된 ‘성자’의 형제자매로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앙을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매 예배때마다 ‘나는 믿습니다(Credo)’라고 믿을 교리로 이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로마 5:1-2)
우리를 하느님의 영광과 참 기쁨으로 초대해 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