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622 거룩한 먹음(그리스도의 성체일)
작성일 : 2025-06-22       클릭 : 6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622 그리스도의 성체일

창세 14:18-20 / 1고린 11:23-26 / 요한 6:51-58

 

거룩한 먹음

 

전통적으로 교회는 삼위일체 대축일 후 첫번째 목요일을 그리스도의 성체일로 기념합니다. 성서에는 예수께서 잡히시기 직전 목요일에 제자들과 빵과 포도주로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성부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는 새로운 계약을 위해 이 만찬을 기억하라고 명하신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2독서인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말씀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증언입니다. 이를 근거로 교회는 성 목요일에 성체성사가 제정된 것으로 기념합니다. 그렇지만, 이 날은 이어서 이어지는 성 금요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죽으심이라는 엄숙한 분위기에 가리는 바람에 주님의 몸과 피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구원의 기쁨이 얼마나 대단한 지 크게 부각되지 못한 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중세시대 때, 교회는 우리가 감사성찬례 때 영하는 빵과 포도주가 단지 물질적인 차원이거나 그저 상징적인 표상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축일을 정했습니다. 천주교에선 이날을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로 부릅니다. 평소에 사제만 성체와 성혈만 영하다가, 이 축일 때만 신자들은 성체와 보혈 모두 영합니다. 이에 반해 이날을 그리스도의 성체일로 부르고 있는 성공회는 매 예배 때마다 사제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천주교는 신자들이 영성체 할 때 예수님의 보혈을 흘리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신자들에게 성체만 주는 데 반하여, 성공회는 신자들도 성체와 보혈을 모두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온전하게 일치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와 보혈에 대한 교리는 종교개혁 시대에 들어와서는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축성으로써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변화에 대하여 천주교와 개신교 간에 첨예한 대립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리적 불일치는 오늘날까지도 교회일치와 성사적 상통을 하는데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적 차이로 인해 교단 간에 사제직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근거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교리적 설명이나 신학적 논쟁보다도 저는 그리스도 성체 축일을 기념하면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의 영적 의미와 우리 삶에 주는 실천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문득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실 때 악마가 했던 유혹이 생각났습니다. 악마는 허기지신 예수께 다가와이 돌 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루가 4:3)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현혹되지 않으시고 당신의 배고픔을 극복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고 하시면서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두 가지 상반된 빵의 이미지를 가지고 묵상할 때, 저는 이 둘 간에는나만이라는 것과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마의 빵이 나의 약점으로 파고들어와 오직 나만의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기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예수님의 빵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근거인 하느님과 연결되어 모두가 살아나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사는 길은 악마의 빵이 아니라, 예수님의 빵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성체와 보혈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실천적 의미에 대해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저는 얼마전에 SNS에서 본 뉴스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최근에 미국 LA에서 이민자 단속으로 촉발된 극렬한 저항 가운데 어느 한국인이 운영하는 푸드트럭에서 일어난 작지만 아름다운 감동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요내용은 이렇습니다:

현재 불법이민자들을 추방하기 위해 강경진압에 나선 미국연방정부로 인해 LA 시내는 순식간에 거대한 화약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들과 시위대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현장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서울컵밥이라는 작은 한국음식 트럭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거리에서 분노에 찬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과 헬멧과 방탄조끼와 방패 뒤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막아서는 경찰들이 함께 줄을 서서 음식을 사 먹고 있었습니다. 마치 증오의 폭풍우 한 가운데 있는 태풍의 눈처럼 그들은 총 이랑 방패, 피켓을 잠시 내려놓고 그 트럭 앞에서만큼은 서로 섞여서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트럭 안에는 중년의 동양인 남성이 쉴 새 없이 밥을 푸고, 고기와 채소를 볶아 컵에 담아내어 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음식이라는 차원을 넘어 지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어루만지는 듯한 깊은 위로였습니다. 그 트럭에는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밥은 먹고 다닙시다라는 서툰 영어로 쓰인 작은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알음알음 알려지자, 어느 날 한 방송국 기자가 왔습니다. 그는 카메라를 향해 여러분, 보십시오. 로스앤젤레스가 불타고 있는데 폭도들과 경찰들이 한데 모여 태평하게 소풍이라도 즐기는 듯합니다. 이것이 바로 법치가 무너지고, 도시가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라고 외치면서 밥 먹고 있는 시위대 복장을 한 젊은이와 경찰을 인터뷰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분위기를 깨뜨리고, 다시 갈등과 분노를 점화시켜 자극적인 광경을 만들어내려는 속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식사하던 어떤 사람이 아저씨, 거 되게 말이 많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자, 그 기자는 컵밥을 파는 한국사람을 향해 당신 정체가 뭡니까? 당신은 이 불법적인 폭력시위를 조장하고, 경찰의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폭도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명백한 이적행위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 기자 뒤에서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만하시죠!” 그 사람은 시위를 진압하는 책임자인 경찰 부국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컵밥을 두 개 사서 하나를 그 기자에게 주며 당신도 며칠째 잠도 못 자고 소리만 지르느라 배고플 텐데, 하나 드시죠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당신이 법과 정의를 외치며 증오를 파는 동안, 우리는 현장에서 분노하고 지치고 상처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트럭 앞에서 잠시나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싸우는 상대가 괴물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배고프고 지친 인간이라는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경찰은 간이 식탁에 앉자 컵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라 경찰관들과 시위대들이 트럭주변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어 자리를 잡고 먹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거기에는 침묵이 흘렀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적의에 찬 침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힘겨운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따뜻한 음식을 나누며 잠시 숨을 고르는 그런 성스러운 침묵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그 기자들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접하고 이념과 증오가 따뜻한 밥 한 그릇 앞에서 얼마나 초라하게 무너져 내리는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아름다운 광경으로 느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늘 먹고 마시는 음식을 통해 당신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당신이 달리신 십자가라는 어마어마한 구원사건을 우리에게 가장 깊게 남기기 위하여 우리가 평소에 하는 가장 원초적인 행동인 먹고 마시는 것과 결부시킨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이 행위는 단지 육체의 에너지를 채우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거기에는 앞서 예를 든 것처럼, 미움과 증오로 격렬하게 싸우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그리고 그 밥을 함께 먹으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단죄하는 대상이거나, 심지어 없애 버려야 할 적이 아니라 배고파 하고, 목말라 하는 그래서 생명을 갈구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연민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변화됩니다. 그 변화는 상대를 제압하는 이론도, 압도하는 무력도 아닌 함께 나누는 밥입니다. 예수님은 이 단순하고 원초적인 행위를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와 부활로 연결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되게 하고, 나아가 서로 다르나 주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구원의 신비를 이룹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체,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주는 은총입니다. 특별히, LA 서울컵밥이 경찰관이든, 시위대이든, 어떤 인종이든 상관없이 배고픈 모두에게 따뜻한 밥 한그릇을 주었듯이, 성공회는 영성체를 영하는 사람들이 성공회 신자이든, 천주교 신자이든, 장로교나 감리교 신자던 차별하지 않고, 한 빵과 한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체와 보혈이 주는 이 신앙의 신비를 교회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도 실천해 나갑시다. 그럴 때 신앙인은 자신만 사는 빵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모두가 함께 사는 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신비에 대한 실천적 의미입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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