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706 주님의 제자: 초월과 내재가 연결된 존재(다해 연중14주일)
작성일 : 2025-07-06       클릭 : 1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706 다해 연중14주일

열왕하 5:1-14 / 갈라 6:1-16 / 루가 10:1-11, 16-20

 

주님의 제자: 초월과 내재가 연결된 존재

 

동아시아 고대사상이 가장 활발했던 때를 말한다면, ‘백가쟁명(百家爭鳴)’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사상들을 꽃피운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사상을 언급합니다. 서양사상에서도 이와 비견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고대 그리스 사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는 독보적인 정신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그림이 현재 바티칸 교황의 개인 서재 벽면에 있는 아테네 학당입니다. 참고로 교황의 개인 서재의 네 벽면에는 각각 철학, 신학, 법학, 예술을 주제로 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 중 철학을 대표하는 아테네 학당은 르네상스 시대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가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는 그리스 철학을 대표하는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은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플라톤과 땅을 가리키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진리란 인간의 경험, 물질세계, 또는 특정한 체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진리란 우리의 경험세계 내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철학에선 전자를 초월(transcendence)’라고 하고, 후자를 내재(immanence)’라고 부릅니다. 신학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양사상들은 이 두개의 사조(思潮)간의 논쟁과 상호영향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물질문명이 고도화되어가고 있는 현대세속사회는 점점 내재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느님, 영혼 등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혹은 세계를 멀리하고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러한 가치들만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재적 사고방식에만 머문다면, 인간은 자신들이 규정한 그 한계성에 갇히게 되어서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나를 그리고 우리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킬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오늘 독서는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1독서에서 나병에 걸린 시리아의 사령관 나아만은 유다인 하녀로부터신통하다는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친서를 보내 치료받길 청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왕은 이것은 필시 불가능한 조건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는 구실이라고 안절부절 해합니다. 이에 엘리사가 왕에게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적국의 사령관 나아만은 엘리사 예언자를 만나러 이스라엘 땅으로 갑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보낸 사람으로부터 굳이 예언자를 만날 필요 없이,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크게 노합니다. 왜냐하면, 그 신통하다는 예언자가 자신의 지위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얼마나 위중한지 알고 있다면,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성의 없이 대할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초월한 아주 낯설고 생소한, 그래서 어이없고 화가 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신하의 간언으로 그는 화를 꾹 참고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하였고, 그 결과 그는 싱거울 정도로 아주 쉽게 치유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때론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 그 조건은 인간이 내재된 세계에만 갇혀 있지 않고, 초월의 세계에서 오는 신호를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다음으로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사실, 할례는 아브라함이 야훼 하느님과 맺은 징표이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종교적 신념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할례를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가치로 여겼고, 이 행위를 타민족 신자들에게도 준수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짓은 단지 외형적인 관습일 뿐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 6:14-15)”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몸에 할례를 받았다는 외적표시와 그러한 외적 관습을 지킴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초월적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구분을 초월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자매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할례라는 가시적 차원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비가시적 차원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일흔 두 제자를 뽑아 둘씩 짝지어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하느님 나라와 그 평화를 전하라고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명심할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는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 (루가 10:4)” 라는 말씀과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루가 10:7)”라는 말씀입니다. 첫번째 말씀은 세상적인 것에 머물지 마라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초월성과 이동성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그에 반해 두번째 말씀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하라는 뜻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내재성과 정주성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제자들 중에서 어떤 이가 서로 상반되는 것 중 하나만 했을 경우를 상상해 봅시다. 어떤 제자가 초월성과 이동성만 고집한다면, 그는 자기 신변에 갖고 있는 것들이 조만간 곧 고갈돼서 계속 이동하며 복음을 전하기가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제자가 내재성과 정주성만 하겠다고 하면, 그가 설령 머물고 있는 곳에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순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전자의 말씀이 선교사의 자세를 표현한 것이라면, 후자는 사목자의 자세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는, 그래서 서로가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선교와 사목을 하느님 나라 사명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얼마나 균형 있게 실천하는가에 따라 교회의 사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나를 뛰어넘는 자세, 즉 초월성을 향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발붙이고 있는 환경에 충실한 자세, 즉 내재성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두가지를 가장 이상적으로 이루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초월성으로 말하자면 존귀하신 하느님이시지만, 내재성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 한 가운데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의 핵심은 내가 아버지를 뜻을 이 세상에 온전히 증언한 것처럼, 너희도 나처럼 그렇게 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초월과 내재가 연결된 존재가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교회의 모든 지체는 선교사인 동시에 사목자입니다. 이 부르심은 사제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두 가지 불림을 받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환경에서 주님을 증거하며 선교합니다. 동시에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하느님의 백성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사목 하면서 그 평화를 유지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 나라는 점점 확장하고, 그 나라의 평화가 이루어져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결과를 보고합니다. 그들은 모두 기뻐하였고, 그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 역시 기뻐하였습니다. 그 기쁨이 이제 여기 있는 우리에게도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그 기쁨이 나와 우리 가정, 우리 교회, 그리고 일터와 사회에서도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를 보시고 예수께서도 기뻐하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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