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4 다해 연중21주일
예레1:4-10 / 히브12:18-29
/ 루가 13:10-17
전도, 선교 그리고 복음화
예수 믿지 않는 분들에게 ‘전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면 십중팔구 별로 긍정적인 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지하철, 길거리 등 공공장소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구호를 외치거나, 스피커로
찬송가를 트는 행위, 또는 물티슈와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교회에 나오라고 강권하는 그런 행동에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성공회 같은 점잖으신 신부님들과 신자분들은
전도라는 말보다는 선교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시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이유에서 천주교에서도 전도보다는
선교라는 말을 더 씁니다. 그리고 간혹 공식문서에서 영어단어는 비슷하면서도 번역을 좀 달리한 ‘복음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뜻을 가지면서도 대중적 이미지와 교단 간의 편견이라는 벽으로 인해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말들이 가지고 있는
뜻과 그 강조점은 무엇인가요?
먼저, 전도란 말은 영어로 Evangelis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희랍어 ‘에우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 뜻은 ‘기쁜
소식(Good News)’, 즉 복음(福音)입니다. 4개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씌어진 마르코 복음 첫 문장에는
다음과 같이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Ἀρχὴ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θεοῦ). (마르 1:1) 마르코 복음의 이 선언에 기초하여 우리 신앙인들은 기쁜 소식이자 복된 소식의 핵심은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이것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도(道)를 전(傳)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전도(傳道)’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교란 말은 Miss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로마제국 시대 사신을 파견하거나 군대를 파견하는 라틴어 ‘미시오(Missio)’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단어를 차용해서 하느님의
사명을 받아 이 세상에서 그 임무(mission)를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Mission의 참된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양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에 대한 교리와 그 사명을 담보하고 있는 교회를 널리 선포한다는 의미로 ‘선교(宣敎)’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화란 말은 영어로 ‘Evangeliz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앞서 언급한 전도와 선교에 대한 과정과 결과를 지칭할 때 사용합니다. 특별히, 이 단어는 개인의 변화뿐만 아니라 한 집단, 민족, 문화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그 가치로 변화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컨대, 구한말 복음을 받아들인 신앙선조들이 신분이나 성별의 차별이란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형제자매라는 삶의 태도로 변화한 것을 가리킬 때 ‘복음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처럼 전도, 선교, 복음화는
그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핵심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 선교, 복음화의 핵심인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복음이란 뭔 가요? 오늘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 주신 기쁜 일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수님과 제자들은 회당에 가셔서 종교예절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때 18년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가 굽어진 여인이 거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여자들이 회당에서 예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그 여인은 회당 안이 아니라 입구 바깥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고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루가 13:1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등장하는 ‘떨어졌다’라는 단어는 15절에
있는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에 있는 ‘풀어내다’와 동일한 희랍어인 ‘루오(λύω)’입니다. 즉, 병이 나았다는 것은 마치 가축이 족쇄에서 풀려나듯 ‘자유를 얻었다’, ‘해방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 여인을 병마의 족쇄에서 해방시켜 주신 다음, 손을 얹어 안수해 주십니다. 그러자 그녀의 굽은 등은 쭉 펴지고, 그녀는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꽁꽁
묶고 있는 사슬,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 되었든 심리적이고 영적인 것이 되었든지 간에 그 족쇄에서 자유와
해방이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곧 강한 장애물에 부딪힙니다. 그것은 이 복음을 안식일에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종교 규정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제정하신 안식일이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가로막는 기가 막힌 모순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에 정한 규정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반박하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
가운데 누가 안식일이라 하여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루가 13:15) 이처럼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짐승을 풀어 먹이를 먹인다면, 하느님의 형상인 사람을 죄와 질병에서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공동번역성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번역해서 그 뉘앙스를 제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 뜻대로 번역하자면 “이 여자도 아브라함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을 통틀어 오직 이 곳에만 나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여성을 사람 취급하지 않은 사람들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은 예수님의 혁명적 선언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화’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모두 기뻐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전도’란
예수께서 행하신 이 기쁜 일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란 예수께서 행하신 그 사명을 이어받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사슬에서 해방되고, 마침내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와 선교가 가져오는 결과, 즉
‘복음화’입니다. 이
복음화로 우리는 죄와 악마의 권세에서 해방돼서 아브라함의 아들과 딸이 되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변화와 기쁨이 있음에도 불구하는
우리는 그 사명(mission)받기를 두려워하고 주저합니다. 마치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아 예언자가 “아! 야훼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예레 1:6)라고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마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예레 1:7-8) 하느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선교라는 임무를 받을 때, 거기에는 우리의 인간적인 면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함께 하심이 있다는 약속도
더불어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아랫사람에게 명령하고 팔짱 끼고 지켜만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 역시 우리와 함께 그 일에 참여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이것을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라고 부릅니다. 비록 가시적으로는 선교가 인간들의 활동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동행하시는 신비한 활동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과 하느님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할
때 전도, 선교, 그리고 복음화는 성취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가장 완벽하게 행하신 분이십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예수님이 하신 미션, 그 분이 하신 전도, 그리고 그분을
통해 변화된 복음화를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힘차게 추진해야 합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전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더 이상 선교가 예전처럼 되지 않고, 교회숫자가 많아지는데도 복음화는 되질 않는다고 우려하는 것은 어쩌면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처럼 안식일 규정에 사로잡혀 성령께서 이 시대에 역사(役事)하시는 것을 제대로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전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히브 12:22)을 향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교회, 우리의 성전은 그 오랜 세월 병마의 족쇄에 묶여 들어오지 못하고 배회하는 낡은 회당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기쁨이 넘쳐나는 새로운 주님의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유와 해방의 공간인 새 성전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을 부르는 전도와 선교가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파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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