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831 외유내강과 외화내빈(다해 연중22주일)
작성일 : 2025-08-31       클릭 : 1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831 다해 연중22주일

예레 2:4-13 / 히브 13:1-8, 15-16 / 루가 14:1, 7-14

 

외유내강과 외화내빈

 

외유내강(外柔內剛)’이란 말이 있습니다. ‘겉은 부드럽지만 속은 강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진서(晉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진서》를 보면, 감탁(卓尋)이란 관리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다스리는 곳에서 은혜로운 정치를 하였다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는 이를 통해서 외유내강을 가진 자가 이처럼 인자한 정치를 하는 까닭은 얼핏 보면 마음이 여려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우유부단하지 않고 강단(剛斷)이 있어서 자신의 속에 지닌 뜻을 꺾지 않는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그렇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외화내빈(外華內貧)’입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부실하다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말로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실속이 없다화이부실(華而不實), ‘실속 없는 말과 허세만 부린다허장성세(虛張聲勢)’가 있습니다. 모두 외유내강과 정반대되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말들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올바르고 현명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지혜는 자신을 알리는 것이 미덕이고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처세술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잔치의 비유를 들어 이러한 태도가 왜 중요한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애찬을 나누듯이, 고대 유다 사회에는 안식일에 잔치를 차리고 남을 초대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랍비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안식일에는 손님을 접대하라고 가르쳤고, 그것을 종교적 의무로 생각했습니다. (느헤 8:9-12 참조) 그런데 잔치가 열릴 때마다 율법학자, 회당장, 바리사이들은 저마다 앞다투어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자주 아웅다웅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러한 훈계를 들려주십니다. 잔치에 대한 담론(談論)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초대받은 이들, 즉 손님들에게 주는 훈계이고, 뒷부분은 초대하는 이, 다시 말해 잔칫집 주인에게 주는 훈계입니다. 각각 조건-부정명령-긍정명령-약속의 말씀 순으로 짜여 있습니다. 먼저, 손님에게 주는 훈계를 보면, 누가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이란 조건이 나오고, 윗자리에 가서 앉지 마라라는 부정명령과 맨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라는 긍정명령이 나옵니다. 그러면 영예롭게 보일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다음으로 주인에게 주는 훈계를 보면, 점심이나 저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할 때라는 조건이 나오고, 잘사는 이웃사람들을 부르지 마라라는 부정명령과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라라는 긍정명령이 나옵니다. 그러면 행복하다 …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친구, 형제, 친척 등을 부르지 마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정말 잔치에 부르지 마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해득실을 따지지 말고 누구에게든 자비를 베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할 때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종말에 가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며, 이것이 참다운 처세술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히브13:2) 히브리서 저자가 언급한 그 사람은 바로 신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은 세 사람의 나그네를 정성껏 대접하였습니다. 나그네들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축복하였고, 과연 그들의 말 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늙은 나이에 이사악을 낳았습니다. 이처럼 사심 없이 베푸는 인간의 행동은 하느님을 기쁘게 하고 축복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강함에 홀려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예전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던 소중한 깨달음과 경험을 잊어버리고, 눈 앞에 있는 이익과 갖가지 유혹에 현혹되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아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질책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사제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 법전문가로 표현한 지식인들, 백성의 목자로 상징되는 정치지도자들이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시키고 자유와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도록 만들어 주신 야훼 하느님을 저버리고, 이웃나라가 섬기는 우상과 그 가치들에 현혹되고 있는 점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아는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하늘도 놀랄 일이다. 기가 막혀 몸서리칠 일이다. 이는 내 말이니, 잘 들어라. 나의 백성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생수가 솟는 샘인 나를 버리고 갈라져 새기만하여 물이 괴지 않는 웅덩이를 팠다.” (예레 2:12-13)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진리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반대일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은 이래, 참과 거짓이 뒤바꿔져 버린 인간들이 겪고 있는 비극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화내빈, 즉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빈곤한 것을 좋다고 여기고, 외유내강, 즉 안은 강건하지만 겉모습은 부드러운 것을 약하다고 무시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믿음생활을 할 때도 강하신 하느님, 성공과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을 찾지만, 그 하느님이 죄에 빠진 인간을 위하여 낮은 곳으로 내려와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길은 외면합니다. 그러나 시류에 휩쓸리는 세상사람들의 행동과 우리의 잘못된 믿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그 기반이 모래라면 그것은 신기루가 될 위험이 높습니다. 반대로 겉보기에는 소박하더라도 그 집이 반석위에 세워졌다면 그 집은 오래 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외화내빈이 아닌 외유내강의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요? 성 어거스틴은 예수님은 교만한 자들과 겸손한 자들을 확실히 구별하시는데 바로 겸손 이야말로 메시아 시대의 특징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첫째 미덕은 겸손이요, 둘째 미덕도 겸손이고, 셋째 미덕도 겸손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겸손은 마치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서 묘사하는 물()과도 같습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 제8장에서 물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최고의 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만물을 선하고 이롭게 하며 정결케 합니다. 물은 세상사람들이 싫어하는 천한 곳에 머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에 가까운 것입니다. (上善若水水善利万物而不处众之所故基于道)

물은 철이나 돌과 비교해 볼 때, 겉보기에 모양도 없고 힘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귀중함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물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서 세상만물을 정결하게 하고, 생명을 줍니다. 노자는 이처럼 물이 갖고 있는 겸손의 성질을 도()라고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물을 죄를 씻어내는 정결과 생명을 주는 종교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눈뜨고 코 베어 간다고 할 정도로 치열한 다툼과 긴장으로 가득한 정글 같은 곳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물처럼 살아간다는 것, 낮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삶의 선택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손님이 되었건, 주인이 되었건 간에 이러한 겸손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기력해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충만하기 때문에 겸손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이 내 그릇에 은총의 물을 쉴 새 없이 부어 주시기 때문에, 나는 충만함이 넘쳐서 그 선함을 물처럼 내 주위로 흘러 내보내는 것 과도 같습니다. 마치 샘에서 물이 끊임없이 나오고, 쉬지 않고 흐르는 강물처럼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능히 낮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하느님이 주시는 그 충만한 은혜를 못 받는다면, 우리는 자신만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해야 하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그 내적 에너지가 곧 고갈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갈되어가는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남의 것을 뺏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너도, 그리고 모두가 서로 이전투구로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 그 은총에 나를 개방할 때, 나는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로 충만해져서 외유내강한 사람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잔치 비유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 잔치로 배부르게 하시고, 그 충만함으로 겸손케 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덧글쓰기  

광고성 글이나, 허위사실 유포, 비방글은 사전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이전글이 없습니다.
다음글 베드로 25-08-24 23


묵상 영성 전례 옮긴글들
이경래 신부 칼럼 김영호 박사 칼럼

홀리로드 커뮤니티

댓글 열전

안녕하세요?선교사님!
정읍시북부노인복지관 멸치 판매..
원주 나눔의집 설명절 선물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