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0921 위기 시대에 ‘약은 청지기’ 비유를 생각하다(다해 연중25주일)
작성일 : 2025-09-21       클릭 : 2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0921 다해 연중25주일

예레 8:18-23 / 1디모 2:1-7 / 루가 16:1-13

 

위기 시대에 약은 청지기비유를 생각하다

 

요사이 뉴스를 통해 저는 사람들의 분노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는 커다란 전환점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네팔에선 분노한 사람들에게 관리들이 얻어맞고, 지도자는 해외로 도망가서 정부가 붕괴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에선 방만한 재정지출과 무분별한 외국인 유입으로 분노한 사람들의 시위로 도시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곳곳에선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개발도상국은 개발도상국대로 각자 자신들만의 사정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스럽고, 이것은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하고 불확실함을 가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혼란한 사회현상과 국제관계의 원인을 찾다 보면 결국에는 경제적 문제로 귀착되는 것 같습니다. 이와같이 혼란한 시대 속에서 사람들은 능력 있고 헌신적인 리더가 나타나서 이 위기를 해결해 주길 바랍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라고 외치신 예수님은 임박한 종말의 시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루가가 그중에서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수집해서 모은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3부분으로 짜여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약삭빠른 집사의 비유(1~8)이고, 둘째 부분은 재물을 올바로 이용하는 법(9~12)이며, 세 번째 부분은 하느님과 재물 중 우리가 따라야 할 궁극적 선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 있지는 않지만 14절부터 15절은 겉으로는 의로운 체하면서도 내심 재물에 탐닉하는 바리사이 인들의 이중성을 폭로하시는 말씀인데, 루가복음 저자는 이 모두를 재물, 특히 종말이라는 위기 시대에 주님의 제자들이 재물에 대하여 어떠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영악한 집사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집사 혹은 청지기는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비유를 들어보면 아마도 여러분은 잘 이해가 되질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주인에게 곧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집사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쳤는데, 오히려 주인이 그런 집사를 칭찬하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서 본문을 분석하는 성서학자들도 8절 후반부에 있는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라는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조각을 루가의 교회 공동체가 약삭빠른 집사 비유이야기에 덧붙여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비유만 듣고 오해해서 약삭빠른 집사처럼 비양심적인 행동을 할까 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러한 비유를 하신 원래 의도가 뭘까요? 이 비유의 핵심은 불의한 처신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위기에 직면하여 그가 행한 민첩한 결단입니다. , 예수님은 곧 닥치게 될 종말에 대비하여 이 집사처럼 유다 백성과 종교 지도자들도 민첩하게 서둘러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약삭빠른 청지기의 비유는 본디 종말론적 비유였으나, 루가는 재물 사용에 대하여 빛의 자녀들은 세속의 자녀처럼 하면 안 된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강조점을 달리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재물을 올바로 이용하는 법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종말론적 관점을 일반적 교훈으로 강조점을 바꾼 루가저자는 재물 사용에 대한 예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들을 모아서 우리가 어떻게 재물을 올바로 사용해야 할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을 충실하고 정의롭게 관리하는 것과 그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 움켜쥐지 않고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실 것이고, 나아가 하느님의 영원한 집에서 행복한 삶을 이어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지향(intention)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재물이란 우리가 섬길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활용해야 할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당신이 만든 이 모든 것을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재물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원죄로 인해 목적과 수단을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수단이었던 재물을 목적으로 삼으면서 재물의 참 주인이신 하느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탐욕이라고 부르고, 칠죄종(七罪宗), 즉 죽음에 이르게 하는 7가지 죄 중 하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지난 913일 성가수녀회(The Society of Holy Cross)설립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습니다. 100년 전, 영국의 베드로 수녀회는 한국에 와서 성가수녀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00년 된 지금, 성가수녀회는 미얀마 수녀들을 양성하고, 미얀마에 분원(分院)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시간을 회상하면서 100년 전 복음의 열정으로 충만했던 영국을 비롯한 서구교회의 모습과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겹치면서 미래에는 한국의 교회가 서구교회처럼 되고, 중국이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회가 그 열정을 이어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 미국 심지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과 그 안에 있는 교회들의 모습들을 보며, 500년 전 종교개혁 시대를 회고해 보았습니다.

종교개혁 직전 대부분의 유럽의 수도사들은 수도원 벽 안에 갇혀 마음을 집중해서 고요함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금속활자 발명과 인쇄술의 발전,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는 새로운 길 발견, 민족주의의 발흥과 근대국가들의 성립 그리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은 견고하고 안정된 교회와 수도원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중세 1000년을 견고하게 유지해 온 신앙인들에게 종말론적인 상황이었고, 일단 그 벽이 무너지자, 혼란과 아비규환이라는 지옥문이 열리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 현장 속에서 신앙인들은 마음의 고요를 유지하는 새로운 기술들을 찾고 사용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종교 제도를 떠나서 영적 체험을 찾아 방황하듯이 말입니다. 그 당시 이태리의 유명한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Mchiavelli, 1469-1527)는 인간이란 원래 은혜를 모르고, 변덕이 심하고, 위선자요, 염치가 없고, 제 몸을 아끼고, 물욕에 어두운 속물이라고 규정했고, 이를 근거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라는 현실주의 세계관으로 리더는 이 혼란한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과 세계관은 그때뿐만 아니라 오늘날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회(Society of Jesus)라는 수도회를 결성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St. Ignatius of Loyola, 1491-1556)두려움보다 더 큰 사랑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리더는 가능한 모든 사랑과 겸손과 자애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이토록 대조되는 세계관을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키아벨리는 세상은 은혜를 모르는 위선자들로 가득한 곳이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냐시오와 그들의 벗들은 개개인을 하느님으로부터 제각기 독특한 재능과 존엄을 부여받은 존재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회원들이 보기에 개개인은 진심으로 자신의 행복을 배려하는 누군가에게 존중받고 신임을 받을 때 최고의 성취도를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신수련 Exercitia Spiritualia>를 통해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일치를 훈련했습니다. 이 수련의 마지막에 있는 사랑을 얻기 위한 묵상은 자신의 내부로 향한 그 열정을 이제 외부로 향해 나가서 주님이 일하시는 이 세계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 특별히 예수께서는 약삭빠른 집사의 비유에서 위기의 순간에 처한 집사의 처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저는 주인으로부터 재산관리를 방만하게 해서 주인에게 해고 통보를 받기 전과 그 후로 대비되는 집사의 마음과 행동을 살펴봤습니다. 아마도 해고 통보 받기 전까지 집사는 주인으로부터 월급받고 그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수동적인 직원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 재산이 자기 것이 아니었기에 굉장히 소극적인 태도로 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고 통보를 받자, 그는 갑자기 자기 힘으로 이 힘든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살기 위해 자기 안에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합니다. 이전에 그는 상대방의 빚은 주인과 관계되었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상대방의 빚이 내가 살 수 있는 통로가 되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이렇게 해서 집사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그저 시키는 것만 마지못해하는 관성에 절은 상태로 살지 말고, 창조적인 모습, 교회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종말론적인 태도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집사는 이 위기를 계기로 주인집에 고용된 그저 그런 직원에서 창의적 인재로 거듭났습니다.

종교개혁 시대, 그리고 오늘날 혼란의 시대에 그동안 과거의 틀에 안주하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집사와 같이 우리들도 변화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동시에 그 변화의 내적동기는 단지 나의 생존과 번영이 아닌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라는 교회가 추구하는 영적 전통에 굳건히 서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위기의 시대에 마키아벨리로 대변되는 세상의 가치를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우리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 일꾼이요 리더로 부르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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