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8 다해 연중26주일/창조절 아모 6:1, 4-7 / 시편 146 / 1디모 6:6-19 / 루가 16:19-31 숲과 콘크리트 1989년 동방정교회 세계 총대주교가 9월 1일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창조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자고 제안한 이래, 교파를 막론하고 온 세계의 교회가 이에 호응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9월 1일부터 자연의 수호성인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축일인 10월4일까지 창조절로 정해 창조 질서 보존과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기간으로 삼았습니다. 대한성공회도 이러한 세계교회의 제안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도 창조절기에 해당하는 성경과 설교로써 창조절을 기념하고자 합니다. <미래소년 코난>이란 만화영화가 있습니다. 아마 4, 50대 교우님들은 어렸을 때 이 만화영화를 보셔서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이오(宮﨑 駿, 1941년~) 감독이 1978년 제작한 이 만화영화는 우리나라에선 1982년 KBS에서 처음 방영하였고, 그 후로도 여러 방송국에서 재방영되었습니다. 이 만화영화는 1970년 발간된 『The Incredible Tide』란 미국의 공상과학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로는 2022년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핵전쟁으로 인해 온 세계 문명이 파괴된 이후의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애니메이션이 묘사한 세상이란 핵폭발로 인해 기후가 급변하는 바람에 빙산이 녹고, 해수면이 상승해서 땅 대부분이 바다로 가라앉아 버려 끝없는 바다 가운데 군데군데 섬들만 남아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주인공 ‘코난’이란 소년과 ‘라나’라는 소녀 그리고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이 탐욕과 광기로 파괴된 인간사회를 재건한다는 내용입니다. 제가 10대 시절, 이 만화영화를 봤을 때 그저 재미있게 본 기억밖에 없었는데, 기후 위기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생태환경이 변하고, 심각한 자연재해 소식을 자주 접하면서 오래전에 봤던 그 애니메이션이 그린 음울한 디스토피아(dystopia)가 어쩌면 실제로 현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듭니다. 이처럼 화려하고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미래는 이 모든 것이 침몰하여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위기감 속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우리에게 영적이자 동시에 실제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비유는 19절부터 26절까지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처지가 저승에선 완전히 뒤바뀐다는 이야기와 27절부터 31절까지 살아생전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대로 회개해야 한다는 부분으로 짜여 있습니다. 루가는 이 비유를 통해 재물의 남용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으로 이끈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 비유 앞부분인 부자와 라자로의 이승에서의 생활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한” 반면에,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개들이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라는 말로 보아 라자로는 자신을 괴롭히는 개들을 쫓을 수도 없을 만큼 힘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부자는 자신의 삶을 즐길 동안, 라자로는 비참하게 살아갔습니다. 그렇지만 부자는 자기 삶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나머지 아마도 라자로라는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분이나 경제적 측면으로 보나 두 사람 간의 차이는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승에서 아브라함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루가 16:26)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큰 구렁텅이’는 내세에서 생겼다기보다는 어쩌면 라자로와 같은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의식하진 못했지만 현세에서부터 부자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 내세로까지 연장된 것일 겁니다. 이처럼 내세에서 뒤바뀐 운명은 이제 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하겠습니다.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습니다. 그는 이승에 있을 때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던 라자로에게 자신의 혀를 식히게 물을 찍어 보내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죽어서까지 라자로를 마치 자기 집 하인 부리듯이 하려고 합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사람이 회개해서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금 실감합니다. 어쩌면 지옥과도 같은 극심한 고통을 당해도 우리의 인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옥과 거기서 겪는 정신적 고통은 영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이란 ‘마음이 바뀐다’, ‘생각이 바뀐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즉 ‘회심(回心)’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부자는 자신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 식구들만이라도 이를 면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라자로를 그들에게 보내서 지옥에 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마도 그들 역시 부자처럼 경건하게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죽은 자가 나타나서 경고하는 충격요법을 써야 할 거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 16:31)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서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와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께서 말씀과 기적을 통해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고 하셨는데도, 그걸 믿지 않고 자신들의 잘못된 생활과 신념을 고수했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백약이 무효’라는 겁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기후와 생태 위기 시대에 우리의 미래, 우리의 내세(來世)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밝고 행복한 유토피아가 될까요, 아니면 우울하고 슬픈 디스토피아가 될까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대비되는 현세와 내세는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과 우리의 후손이 살게 될 미래가 아닐는지 생각해 봅니다. 만일 그러한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2019년 11월 초 저는 민간 전문가들과 함께 독일과 스위스로 출장을 갔었습니다. 저는 당시 교구 선교교육국장으로서 평창올림픽을 전후하여 한반도에 불어닥친 평화 분위기를 선교적으로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방법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그러한 실천의 하나로 독일과 스위스의 환경 및 교육전문가들과 협력하기 위해 그곳에 가서 직접 현장을 보고 계획을 협의하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숲유치원 프로젝트’였습니다. 저는 한국에 숲유치원을 도입하신 분의 소개로 스위스 생갈렌(St. Gallen)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숲유치원을 방문했습니다. 알프스산맥 자락 우리나라 평창과 비슷한 해발고도에 있는 생갈렌의 숲속에 있는 허름한 건물에 아침이 되자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부모들과 헤어진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숲속으로 갑니다. 11월 쌀쌀한 날씨에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된 아이들이 숲속에 빙 둘러앉아 간단히 기도하고, 노래 부르고, 선생님으로부터 그날 뭘 할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고 삼삼오오 흩어져서 숲속으로 들어가 놉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선생님과 아이들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으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연 속에서 친구들과 함께 뛰놀고 배워서 그런지 아이들의 눈망울을 초롱초롱하고 몸은 딴딴해 보였습니다. 도시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자란 아이들과 달리 야생성이 강한 잡초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래전 들과 산으로 뛰놀며 놀던 우리 선조들의 어렸을 적 모습이 저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 저는 북한의 열악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에게 돈이 안 들면서도 건강하게 자라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숲유치원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숲유치원 전문가들과 그 현장을 직접 접하면서 이것은 콘크리트 유치원이라는 온실 속 화초같이 자라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전지구적 갈등과 충돌로 핵무기가 사용되어 인류의 모든 문명이 사라지거나 혹은 기후 위기가 임계점을 넘어 돌이킬 수 없는 자연재해로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성과물들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이때, 자연 속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낼 수 있는 ‘강한 아이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치 구약시대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대비했듯이 말입니다. ‘공간이 정신을 지배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부자가 살던 공간은 그의 몸과 정신을 자신만의 즐거움에 몰두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스위스의 숲유치원에서 봤던 선생님들과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서로 협력해서 생존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습득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들은 앞으로 삶을 살아가며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그리고 이웃들과 어떻게 연대해야 할지를 머리보다 더 근원적인 몸속에 내장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연을 주신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 자연 속에서 숨 쉬며 살아가면서 이웃들과 더불어 나아가 식물, 동물들과 더불어 살아 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우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이 만든 문명은 자연과 점점 단절된 자신만 홀로 빛나는 존재로 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복음에 나오는 부자처럼 말입니다. 이 시간! 창조절을 맞아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하여 하나의 작은 성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또한 되돌이킬 수 없는 내세가 오기 전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근원적인 창조 질서와 다시 화해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그러한 공간을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 가는 결심의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후손들에게도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이란 선물을 계속해서 맛보고 살아가도록 꿈꿔 봅시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선물로 주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