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1005 믿음의 힘(다해 연중27주일)
작성일 : 2025-10-05       클릭 : 21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1005 다해 연중27주일

애가 1:1-6 / 2디모 1:1-14 / 루가 17:5-10

 

믿음의 힘

 

믿음이란 단어는 사랑이란 단어 못지않게 교회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신자들 간에 상대를 칭찬할 때 “000형제님은 믿음이 좋아요”, “000자매님은 믿음이 깊어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목회자가 설교 중에 믿습니까?”라고 소리치면, 신자들은 아멘, 믿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화답하곤 합니다. 그러면서 예배 분위기가 달아오릅니다. 그럴 때, 큰 소리로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뭔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신앙표현에 적극적이지 않은 성공회 신자들에게 오순절 계열의 이런 예배 분위기는 좀 낯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례를 중시하는 성공회나 천주교, 정교회 신자들에게도 믿음은 신앙의 본질적 요소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믿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더욱이 사실과 증거를 중요시하는 오늘날! 믿는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순진하고, 그래서 때론 약간 어리숙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영악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오직 확실한 것만 신뢰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명백한 사실과 증거를 믿는다고 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것을 믿을 순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믿는다기보다는 맹종(盲從)’ 내지 맹신(盲信)’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 확실히 증명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이나 의미에 자신을 걸고 살아가는 의지와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안다라는 요소와 바란다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앎이란 불완전한 앎, 그래서 우리가 계속해서 탐구해야 할 앎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1고린 13:12)라고 노래한 그런 앎입니다. 이처럼 미완성의 진리이기에 우리는 그 진리를 계속해서 알려고 하고 희망합니다. 결국, 종교에서 말하는 믿는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를 넘어서 인격적 신뢰와 헌신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믿음을 기쁨과 평온 속에서도, 심지어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견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성경 말씀들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제1독서 애가서는 기원전 586년 바빌론 왕국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의 심정을 묘사한 노래입니다. 애가서의 저자는 모든 것을 잃고 믿음마저 흔들린 채 실의에 빠진 백성의 고뇌를 그리고 있습니다. 애가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읊조립니다: 밤만 되면 서러워 목놓아 울고, 흐르는 눈물은 끝이 없구나.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들조차 위로하여 주지 않고, 벗들마저 원수가 되어 등돌리는구나.” (애가 1:2) 이 대목은 과거 동맹관계였던 우방들이 지금은 원수로 돌변하여 고립무원에 빠진 고독한 처지를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나라가 멸망하고 극심한 고독감에 처하고 아무런 희망도 사라진 처지에 놓이고 나서야 비로소 야훼 하느님을 거슬렀던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그들은 이 세상에 믿음을 두었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지 처절하게 깨닫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변치 않으신 하느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제2독서 디모테오 후서는 사도 바울이 67년경 감옥에 갇혀 순교를 앞두고서 디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카로 가버렸습니다. 그레스겐스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내가 처음으로 재판정에 나갔을 때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두가 나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2디모 4:10, 16) 이처럼 버림받았다는 고독감과 몰이해, 고문과 곧 집행될 사형 앞에서 그는 심한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 동료 디모테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애씁니다. 그는 디모테오에게 그대가 우리 주님을 위해서 증인이 된 것이나 내가 주님을 위해서 죄수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오.”(2디모 4:8)라고 말합니다. 사실 복음을 증거하다 보면 예수께서 겪으신 것과 같은 운명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당함을 부끄러워함은 복음 증거가 몰고 오는 박해가 두려워 그 증거를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테오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그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지녔던 믿음, 그리고 그에게 안수했을 때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킵니다. 아마도 디모테오는 때때로 우유부단하고 용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이를 책망하기보다는 그의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얻은 믿음과 사랑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믿음의 보화를 잘 간직하라고 권면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하니 더 달라고 청합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양적인 개념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들은 복음 앞부분에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것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무한정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믿음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란 크고 작고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믿음의 양적 개념이 아닌 질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진 믿음이 참믿음이라면 그 믿음이 비록 작다고 할지라도 큰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인간의 믿음이 아무리 많거나 깊다고 한들 비교하기가 불가합니다. 이런 이유로 내가 믿음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했다 하더라도 또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죄짓게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혹은 죄지은 형제자매를 용서하는 일을 잘 수행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특별한 공덕이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들은 복음에서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루가 17: 10)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이유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인과응보 사상에 젖어있어서 하느님과 인간 간의 관계를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 공덕을 쌓으면 하느님은 마땅히 그에 대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한한 인간에게 값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심 앞에 인간의 공덕은 비교 불가하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은 내가 선행을 많이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과 차등해서 받는 그런 성질이 아니라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그 은혜를 깨닫고 그 기쁨으로 주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인간은 채권자와 채무자 관계 아니라 부모와 자녀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행을 했으니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태도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당시 주인과 하인 간의 관계에 빗대어 그들의 착각을 깨우쳐 주신 겁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성경 말씀을 통해 저는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성찰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첫째, 믿음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 생긴다기보다는 하느님이 먼저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콩이 되었건, 팥이 되었건, 아니면 작은 겨자씨가 되었건 우위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모두 같은 씨앗입니다. 우리가 그 씨앗을 받아서 잘 가꾼다면 그 씨앗에서부터 싹이 트고 자라나서 좋은 열매가 열릴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핵심에는 내가 무한하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그러한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릴 행복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유한한 존재들끼리 서열을 짓고 차별해서 행복을 누리는 세상의 이치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기에는 부모이신 하느님 앞에 모두가 사랑받는 자녀들이라는 평등의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서로서로 위해주는 사랑과 섬김의 자세만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이 있는 자는 겸손한 자인 것입니다.

셋째, 진정한 믿음은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내포합니다. 오늘 1 독서에서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유한한 것들을 무한한 것으로 믿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강대국들만 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믿음을 가졌다가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뼈아프게 후회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믿을 때, 다시 말해서 우상들을 믿을 때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인 것입니다.

넷째, 믿음은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 힘을 줍니다. 오늘 2 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이겨냅니다. 더 나아가 디모테오에게도 믿음으로 시련을 이겨내라고 권고합니다. 특별히, 물질문명과 세속화가 나날이 커지는 오늘날! 사람들은 초월을 향한 믿음을 상실하고 점점 영혼이 메말라가고 고독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지금 어디에 있고, 장차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은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에 고통받는 인간을 붙잡아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확실함만 추구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가치가 지닌 한계를 넘어 우리가 아직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유한한 존재가 동경하는 영원한 초월의 가치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이것을 믿기에 지금 이 상황을 마지막으로 여기지 않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여백의 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믿음의 씨앗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이 씨앗을 잘 가꿔서 주님께 그 열매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그 열매가 많든 적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맺은 열매에 함께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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