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1109 부활에 대한 이해(다해 연중32주일)
작성일 : 2025-11-09       클릭 : 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1109 다해 연중32주일

하깨 1:15-2:9 / 2데살 2:1-5, 13-17 / 루가 20:27-38

 

부활에 대한 이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과 논쟁하신 대목이 제법 많습니다. 논쟁의 대상은 주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지만, 가끔 사두가이파 사람들과도 하셨습니다. 지난번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에 대한 설교에서 바리사이의 뜻과 유래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렸듯이, ‘구분된 자라는 의미를 지닌 바리사이는 기원전 2세기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경건한 신앙인 집단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이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에 반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두가이들은 부활도 천사의 존재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언서나 성문서를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직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삼고 있는데, 거기에는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대목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부활 신앙은 유대민족이 이민족의 침략으로 신앙의 구심점인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가 멸망하여, 타국으로 유배를 가면서 기존의 신앙체계가 무너진 가운데 하느님께서 이들을 다시 살리실 거라는 믿음 가운데 나타난 신앙 태도입니다. 이것을 성서학자들은 묵시문학이라고 부릅니다. 이 묵시문학은 로마제국의 식민지하에 있는 예수님 시대에도 중요한 믿음이었고, 심지어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약성서에 있는 요한 묵시룩도 묵시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책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예수님과 부활에 대해서 논쟁했던 사두가이들에 대해 좀 더 언급해 보겠습니다.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사두가이는 다윗 왕 시절 사제였던 사독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2사무 15:24 참조)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사독 후손들에게 사제 직무를 수행하게 맡김으로써 사두가이들이 형성되었고, 예수님 시대에도 계속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직을 중심으로 활동한 것입니다.

앞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로마에 세금 내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총독에게 고발할 구실을 찾고자 논쟁했다면, 사두가이들은 부활 문제를 교묘히 비틀어서 예수님을 난처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만일 예수님이 제대로 답변을 못하면, 부활을 믿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모든 이 앞에서 폭로하여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 타격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신명기 255절부터 10절까지 나오는 수혼법(收婚法)’을 내세워 질문을 합니다. 수혼법에 따르면, 형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경우, 시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그 혈통을 잇게 해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부여, 고구려 등과 같은 곳에서도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를 삼는다는 형사취수(兄死娶嫂)도 이와 유사한 풍습입니다. 이것은 남편을 잃은 과부의 생계를 보호하고, 혈연 간의 결속을 유지하며, 여성의 출산력이 다른 집단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아서 가문의 인구수를 유지하려는 고대사회 상황이 반영된 제도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유교나 기독교와 같은 일부일처 윤리가 확립됨에 따라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특별히, 여성의 인권이 향상되고, 물질적 조건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기이한 제도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 논쟁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 중 하나인 신명기에 있는 수혼법을 근거로 해서 일곱 형제에게 모두 시집간 여인이 부활한다면,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이냐고 극단적인 상황설정으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질문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관념에는 부활 이후에도 현세의 사정, 현세의 질서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그러한 그들의 전제조건을 깨뜨리십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저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루가 20:34-35) 이를 통해 예수님은 부활 이전의 세계와 부활 이후의 세계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왜냐하면 현세를 사는 인간의 생명은 유한해서 언젠가 반드시 죽어야 할 운명이기에 결혼을 통해 아이를 낳아 대를 이음으로써 단절될 위험성을 극복해야 하지만, 부활 이후에는 죽는 일이 없어서 결혼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원천적으로 부활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결여된 지극히 현세 중심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세계를 비교하려면, 두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선()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사두가이들의 비교에는 그 기본조건도 안 되는, 한 마디로 질문 자체가 성립되질 않는 논리구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부활이 모든 이에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35절을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이란 모든 사람에게 자동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활이란 도대체 뭔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두가이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모세오경의 말씀을 들어서 그들의 고정관념을 흔드십니다. 그 이유는 사두가이들은 예언서, 성문서들은 성경도 아니고 오직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 하느님 계시가 담긴 정경(canon)으로 삼고, 거기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부활 신앙은 웃기는 거라고 조소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모세오경 중 하나인 출애굽기 36절의 말씀을 들어 그들의 잘못된 성경 이해를 지적하십니다. 그 대목은 야훼 하느님께서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계시한 말씀입니다. 사두가이파들은 이 대목을 그저 조상들이 믿었던 하느님이란 혈통 관념으로 해석했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족보(族譜)라는 좁은 이해 혹은 조상들이 대대로 믿어왔다는 연대기적(chronological) 관점이 아니라, 공시적(synchronic)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다”(루가 20:38)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사실 모두 하느님 앞에서 삽니다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그들이 살아생전 믿었던 과거의 사건, 과거의 추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해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 시선을 하느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들은 모두 지금도 생생히 살아서 당신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단지 그들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들도, 나아가 우리 뒤에 올 후손들도 하느님 시선으로 볼 때 영원한 현재인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한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관계맺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은 우리 기독교의 핵심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유한한 생명을 지닌 물리적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부활에 대한 신앙은 단번에 그 진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이해됐던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구약시대 사람들의 부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겪은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과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성전의 재건, 민족의 부활을 꿈꾸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이란 아직 이 세상이란 지평 속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들에겐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영원한 세계가 아직 상상이 되질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복음 말씀에서, 그리고 예수님 친히 부활하심으로써 새로운 부활의 지평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보며 그러한 일이 자신들에게도 하루속히 이루어질 지길 학수고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재림(再臨)’이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뿐만 아니라, 주의기도에 있는 하늘에서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염원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바울은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지성을 잃고 쉽사리 흔들리거나 당황해서는 안됩니다” (2데살 2:2)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지금의 현실을 회피하고 무조건 위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두가이가 이 세상에 매여 초월을 보지 못한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으로 부활이 빨리 와서 나도 예수님처럼 변모해서 하늘로 올라가야지 하는 것도 또 다른 극단입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은 이 세상의 시각에만 갇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현재의 삶을 회피하고 미래와 저세상만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부활이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 앞에 서 있으므로 해서 과거 떠돌이 아브람에서 신앙의 아브라함으로 부활했습니다. 모세 또한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도망자에서 해방의 선도자로 부활했습니다. 부활은 이처럼 하느님을 만나고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삽니다. 그것은 여기 그리고 지금(hic et nunc)’에서 시작합니다. , 하느님의 부르심 그리고 그 부르심을 통해 하느님과 만나서 내가 변화될 때, 부활은 시작됩니다. 기독교가 고백하는 부활은 이 세상을 살다가 죽어서 내 혼이 저승사자를 만나 죽느냐, 사느냐 심판받아서 살게 되면 부활했다고 여기는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또는 사두가이처럼 이 세상의 복을 죽어서도 영원토록 누리고 싶은 생명 연장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증언하는 부활이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의 순간이 부활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부활시킬지 말지 결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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