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1116 끝과 시작(다해 연중33주일)
작성일 : 2025-11-16       클릭 : 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1116 다해 연중33주일

이사 65:17-25 / 2데살 3:6-13 / 루가 21:5-19

 

끝과 시작

 

얼마전 경주 APEC 행사에 젠슨 황(Jensen Huang)이란 NVDIA회사 CEO가 우리나라에 와서 정부인사들과 주요기업 CEO들과 일련의 회동을 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는 1993년 그래픽 회사를 창립했고, 현재는 NVDIA를 단순히 고성능 게임용 그래픽 카드를 만드는 회사를 넘어서 데이터 센터 플랫폼, 자율주행 자동차 플랫폼, AI 슈퍼 컴퓨터 등 AI시대를 선도하는 세계적인 핵심기업으로 키워냈습니다. 최근에 저는 2025 2월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에서 열린 ‘2025 세계정부정상회의(World Governments Summit 2025)’에서 했던 대담영상을 봤습니다. 거기서 질문자가 젠슨 황에게 모두가 컴퓨터, IT, 전자공학에 집중하는 AI기술혁명 시대에 당신은 만일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다면 뭘 공부하고 싶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엔지니어 출신이고 AI 시대를 선도하는 그이기에 당연히 프로그래밍 언어나 컴퓨터 공학을 하고 싶다는 답변을 예상했지만, 엉뚱하게도 그는 생물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AI발전으로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가 인간의 언어와 닮아가고 있고, 그래서 미래에는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굳이 컴퓨터 언어를 모르더라도 인간의 언어로 쉽게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AI 도구를 생성하고 이용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 외부 환경에 비해서 정작 인간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 외부에 있는 AI기술과 인간 내부를 다루는 생물공학이 결합된 새로운 차원의 신세계를 열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습니다. 저는 그 대담영상을 보고서 보통사람과 리더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사람과 돈이 몰리는 현재상황에 주목하고 그것을 목표로 노력한다면, 리더는 지금 정점에 있는 것이 갖고 있는 한계를 보고, 그 이후를 준비하는 자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 시대 그리고 유대민족에게 있어서 최 정점에 있는 것에 대한 대립되는 두 가지 시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의 정체성인 유대교와 그 물리적 구현체인 성전(聖殿)입니다. 사실, 구약시대부터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자 정신적 구심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민족이 멸망한다는 것이요, 심지어는 세상의 종말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 성전은 솔로몬 왕 때 처음 세워졌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587년 바빌론 왕국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 때 하층민들을 제외한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그 당시 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거행하는 전례예식을 할 수 없게 되어 엄청난 충격과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빌론 왕국을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기원전 538년 황제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의 귀향과 성전재건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성전재건에 착수하여 기원전 515년 새 성전을 완공하였습니다. 이처럼 성전에 대한 유대인들의 존경과 정성은 대단하여 성전 완공 이후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성전을 확장하였고, 예수님 시대 직전인 기원전 20년경에는 오늘 복음이 표현하듯이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꾸며진 성전을 보며 감탄”(루가 21:5)할 정도로 웅장한 규모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볼 때마다 그 뿌듯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유대인들에게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루가 21:6)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그들은 아마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 종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 술 더 떠 반란의 소문과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무서운 징조가 나타나는 등 실로 가공할만할 공포를 열거하십니다. 실지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기원 후 66~70년에 걸쳐 제1차 유다 독립전쟁과 로마황실의 황제계승을 둘러싼 내란이 발생했는데, 이 시기 예루살렘 성전은 또 다시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로마에 대항하여 2, 3차 독립전쟁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여 유대인들은 그 땅에서 영구 추방되었으며, 로마황제는 유대 흔적을 완전히 말살하려고 지명 마저도시리아-팔레스티나(Syria-Palestina)’로 고쳤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지역을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유래에 기인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단지 성전이 파괴될 거라는 예언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파괴된 이후, 새롭게 생길 공동체가 겪을 일들도 말씀하십니다. , 예수님과 복음을 증언한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죽임을 당하기까지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자세히 보면, 하나의 이야기에 성전파괴 예언과 박해 예언이라는 두 가지 사항이 담겨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루가 복음 저자가 80년경 루가 복음을 쓸 때, 예수님의 말씀모음들을 편집하면서 두 가지 말씀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서 엮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모습을 보고, 또한 초대교회 공동체가 박해를 겪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예수께서 예전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을 것이고, 이러한 일들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닌 하느님의 예정 속에 있는 일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혼란속에서도 하느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며 마침내 참 생명을 얻을 거라는 희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루가 복음저자는 당시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격언인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루가 21:18)란 말씀으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전적으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더 나아가 19절에는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란 더 강한 말씀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얻는다란 말은 올림픽 경기에서 이긴 선수가 상을 받는다는크타오마이(κτάομαι)’라는 단어로서, 그것은 낡은 옛 세상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루가 복음 저자의 강한 열망이 담겨있는 표현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고 대림으로 시작하는 새 해를 기다리고 있는 연중시기 막바지에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설교 서두에 언급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고도로 발전한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문명 속에서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술수준이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다루는 생명과학과 결합한다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 상상이 안 갈 정도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욕망과 호기심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과학기술로써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인간이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새로운 시대인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아마 미래에도 인간세상은 여전히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이 가꾼 과일을 남이 따먹는 황당한 일들이 여전히 일어날 것이며, 늑대가 어린 양을 잡아먹고, 사자와 소는 여전히 원수지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인간의 기술적 진보로 여는 새 세계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여전히 낡은 성전(聖殿)’에 갇힌 세계일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올 신세계는 뭘 까요? 그것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세상입니다. 예언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아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지난 일은 기억에서 사라져 생각나지도 아니하리라. ……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고 살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서로 해치고 죽이는 일이 없으리라.” (이사 65:17, 25)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새로운 예루살렘, 새로운 성전이라는 비전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감탄하며 보고 있는 성전을 가리키며 그 성전은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과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의 한계성을 모두 인식하는 것!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숙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올 세상의 왕직으로 불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하느님의 눈으로 그 한계를 봐야 하는 예언직이라는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모두가 과학기술의 밝은 면만 말하고 추종할 때, 우리는 그것이 가져올 위험성을 감지하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지금이 기독교 윤리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자동차가 가속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이라는 두 요소가 있어야 달리듯이 말입니다. 이와 같은 왕 직과 예언직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모여 참 예배를 드립니다. 교회는 이렇게 예배 드리는 것을 사제직을 수행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제들로서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다가올 하느님 나라 왕 직을 고대하며, 이 세상에서 수행하고 있는 예언자의 사명을 점검합니다. 오늘 이 예배가 바로 그 시간입니다. 

이제 교회력으로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그리고 대림을 기다리며 새 시작을 맞이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한 해의 끝을 돌아보고, 다가올 새로움이 주님의 길과 부합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우리를 예언직과 왕 직과 사제직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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