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30 가해 대림1주일
이사 2:1-5 / 로마
13:11-14 / 마태 24:36-44
공포로서의 종말, 희망으로서의 종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2024)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현대 조직신학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끼친 독일의 대표적 신학자 중 한 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그는
18세에 징집되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진지가 무너지고 동료들이 죽는 등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었습니다. 그리고 영국군에 잡혀서 스코틀랜드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고난 속에서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라는
문제로 씨름하는 가운데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이 끝나고 독일로
돌아온 후,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신학박사와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사목자로서 또한 대학교수로서 일하면서 활발한 저술활동도 하였습니다. 그 중 1964년에 출간한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은 지금까지도 기독교 종말론 분야에서 교과서 같은 책으로 읽힐 정도로
유명합니다.
그 책이 출간될 당시 유럽은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인간의 광기에 대한 깊은 절망감 그리고 서구사회를 지탱해 왔던 기독교 가치체계의 무기력함을
맛보면서 이른바 신의 죽음을 주장하는 등 전반적으로 정신적 아노미(anomie)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몰트만은 젊었을 때 겪은 전쟁의 참상 중에 깨달은 신앙을 근거로 미래에 대한 희망과 그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사명에 신선한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교회력으로 새해를 여는 대림1주일! 교회는 독서와 복음을 통해 종말을 언급합니다. 먼저, 오늘 들은 제1독서 이사야서 2장은
당시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을 받던 유다 민족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당시 외교•군사적 긴장과 내부에 만연한 불의와 도덕적 타락이라는 사회현상을 보며 마지막 때에 이 모든 것이 정화되어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
시온 산으로 모여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고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라는 이상적인 미래를 예언합니다.
다음으로 제2독서 로마서
13장은 57년경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 당시 로마황제가 추방했던 유대인들을 다시 로마에 와서 살게 풀어준 직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 신자들만 있었던 교회에 유다인 신자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두 집단 간에 사고방식, 풍습 등과 같은 차이로 인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인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세상 권세에 복종할 필요가 없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극단적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도 바울은 종말이 임박했으니
방종해도 된다는 태도를 경계하면서 오히려 그럴수록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로마 13: 12) 서로 사랑하면서 율법을 완성하라고 당부합니다. (로마 13: 8-10 참조)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은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이민족의 압제에서 해방된 진정한 독립을 열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니엘 예언자가 활동했던 바빌론 유배시기를 묘사한 다니엘서에 있는 종말론적 환상과 예언을 읽으면서 그러한 날이 과연 언제 올지 토론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마태 24:3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날은 우리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 날에 일어날 현상을 묘사하면서 사람들이
악하게 행동한 것을 심판한다는 말은 없고, 단지 일상에 젖어 살다가 갑자기 종말이 닥쳤다는 점만 부각시킨
것입니다. 즉, 마지막 날에 똑 같은 일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하는 모습만 묘사합니다. 이 묘사에서는 데려간 사람이나 남겨진 사람에 대하여 일체의
평가를 내리진 않고 있습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남겨졌다고
해서 구원의 가능성이 배제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남겨진 사람에게도 끝까지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이 굉장히 궁금해하는 마지막
날에 관하여 말씀하신 이유는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은 도둑처럼 올 것이니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 44)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종말이란 미래를 그저 걱정하거나, 아니면
언제 올지 호기심으로만 따지지 말고, 그 날을 잘 맞기 위해 지금 우리의 삶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그
강조점을 옮기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요? 마태오
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산상설교(5장~7장 참조)에서 언급하신 윤리적으로 바른 삶, 24장 45절부터 51절까지 언급한 주님이 맡겨 주신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청지기로서의 삶, 그리고 최후의 심판 비유(25:31-40)에서
구원의 기준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삶 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종말 혹은 마지막날은 우리가 살다가 죽을 날 또는 세계의 마지막에 일어날 초자연적인 일들만 의미하진
않습니다. 그렇지만,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종말을 자연스럽게 언젠가 일어날 일 그래서 지금 살아가는 나 혹은
세상과는 당장 와닿지 않는 뭔가 기괴한 어떤 것으로 상상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랫동안 신학에서도
종말론은 창조론, 구원론, 그리스도론, 교회론 등등 여러 신학적 주제들을 다 다룬 후에 맨 마지막에 살짝 다루는 뒷문 정도로만 취급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시간의 흐름이라는 자연현상을 벗어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종말이란
특별히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전체 삶을 규정짓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에서 있어서 종말이란 하느님이 우리를 마침내 온전히 구해 내실 거라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약속을 단지 말씀으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친히 인간의 살과 피로 오셔서 그 약속을 직접 보여주시고 들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약속의 가시적 표지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느님은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불어넣어 주시어 우리가 예수를 통해 보고 들은 그 기쁜 소식을 잊지 않도록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날은 희망이며, 우리는 그
약속의 힘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교회력으로 새해 시작에 그 끝을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끝이 단지 끝이 아니라, 새 시작이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논리와 다른 그리스도교만의 역사관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끝은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이 없어지는, 그래서 무섭고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새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구원의 완성이자, 하느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되는 시작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머리로 삼고 있는 교회는 미리 맛본 그 나라가 온전히 실현되기까지
희망을 갖고 역사의 파도를 넘으며 항해하는 중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이 그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항해 중에 때론 엄청난 파도로 배가 난파될 위험도 겪지만, 우리는 그 끝을 알기에 희망을 갖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 역경을 헤쳐 나갑니다. 하느님은 이 배에 타고 있는 우리를 마침내 당신 나라에 닻을 내리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초에 불을 키면서 종말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성탄나무와 구유를 장식하며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교회의 풍습은 단지 과거에도 오시고 올해도
오실 아기예수맞이 행사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을 넘어서 언젠가 온전히
실현될 하느님 나라의 재림이라는 종말론적 희망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희망을 위하여 주님이
맡겨 주신 청지기 사명을 수행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어둠을 밝히시는 빛이시요, 희망의 징표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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