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51207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가해 대림2주일)
작성일 : 2025-12-07       클릭 : 15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51207 가해 대림2주일

이사 11:1-10 / 로마 15:4-13 / 마태 3:1-12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

 

역사를 배울 때 우리는 고대-중세-근대-현대-당대 등 시간에 순서에 따라 연대기적으로 학습합니다. 그러다가 역사를 좀 더 깊이 연구하면서 우리는 역사의 주체는 무엇인가, 역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역사의 목적 또는 방향은 무엇인가 등등 역사적 사실들을 선택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관점을 필요로 합니다. 역사학에선 이것을 사관(Historiography)라고 부릅니다. 즉 사관(史觀)이란 한자 그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대표적인 사관들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모든 문명이나 국가는 흥망성쇠를 반복한다는 순환론적 사관(Cyclical View), 역사는 신의 섭리 하에 시작부터 끝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기독교적 사관(Christian View), 역사는 인간의 물질적 삶과 생산방식을 놓고 투쟁하는 가운데 발전한다는 유물론적 사관(Materialistic View), 민족의 시각에서 역사를 해석하면서 이를 통해 민족의 우수성과 정체성을 고취하려는 민족주의 사관(Nationalist View) 등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과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자연과학처럼 객관적인 사실만을 통해 기술해야 한다는 실증주의 사관(Positivist View)과 역사를 정치적인 면에만 치중하지 말고, 사회, 문화, 일상생활 등 인간의 총체적인 삶을 장기적이고 구조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아날학파(Annales School) 등 다양한 사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사관마다 시대를 구분할 때, 그 경계선을 딱 잘라서 명확하게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옛 시대의 한계가 명확한데 아직 새 시대가 확실히 자리잡지 못하는 애매한 기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과도기(Transitional Period)’라고 부릅니다.

대림 2주일을 맞아 저는 우리가 들은 독서와 복음을 과도기라는 관점에서 보고자 합니다. 먼저, 1독서 이사야서 11장 말씀을 봅시다. 이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기원전 8세기 북 이스라엘왕국은 아람-다마스쿠스 왕국과 함께 남 유다 왕국을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남 유다 왕국의 아하스 왕은 아람-다마스쿠스 북쪽에 있는 앗시리아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중동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앗시리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스라엘과 아람-다마스쿠스를 정복하여 중동의 절대강자로 올라섰습니다. 비록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의 도움으로 침략을 막아냈지만, 앗시리아 제국으로부터 사사건건 내정간섭과 조공을 바쳐야 되는 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 왕실은 잘려나간 그루터기처럼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 잘려나간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날 거라고 예언합니다. 여기서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인 이새를 가리킵니다. 이사야서는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왕이 태어날 것이고, 이 왕은 하느님이 부어 주시는 영으로 충만하게 된 분으로서 하느님의 정의를 온전히 실현하여 마침내 모든 민족과 심지어 창조세계가 평화롭게 사는 이상적인 세상을 만드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훗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서의 이 예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렸고,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애용하는 구약성경이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제2독서 로마서 15장을 보겠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 때 잠깐 언급했듯이 로마교회 안에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초대교회에는 다수가 유대인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안에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유대교 관습과 문화를 고수하고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강요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신명기, 시편, 이사야서 등의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면서 유대계 신자들이 그들의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모든 민족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큰 품으로 들어오라고 권고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로 탄생한 교회야말로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이새의 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며, 이 싹이 자라나서 모든 민족에게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희망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보도록 합시다. 마르코 복음이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마르 1: 4 참조)를 강조했다면, 마태오 복음은 세례의 모습보다는 하늘나라를 설교하는 예언자로서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마태오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메시지가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와 동일하다고 봅니다. 그 메시지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2)입니다. 이를 통해 마태오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세례자 요한이 준비하고, 예수를 통해 발현된 하느님 나라운동을 교회가 이어받아 간다는 것입니다.

마태오가 묘사한 세례자 요한은 전형적인 과도기적 인물입니다. 우선, 그의 외형에 대한 묘사와 그가 살던 지역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것은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갈 때, 거친 땅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던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엘리야 예언자의 외모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구약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동시에 그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풉니다. 그 세례는 지금처럼 머리에 물을 붓는 약식세례가 아닌, 강물에 온몸을 완전히 담그는 침례입니다. 유대교에선 대사제들이 제사를 드리기 전후에 몸을 씻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레위 16:4 참조) 그러나 사제들이 씻는 행위는 일상적인 전례적 행위였습니다. 그에 반해 세례자 요한이 행한 세례는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앞두고 그동안 지은 죄를 고백하는 가운데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립하겠다는 다짐 아래 시행하는 일회적 행위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운동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세례에 많은 군중들이 몰려왔습니다. 그 중에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정치적 성향이 달라 평소에 서로를 늘 비난하고 다투는 집단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라고 하자 겁을 먹고 자신들도 세례자 요한으로 향하는 그 대열에 합류해 죄를 면하고 싶어합니다. 그러한 그들을 속셈을 간파한 세례자 요한은 독사의 족속들이란 거친 표현을 써가며 그들의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회개했다는 것을 행실로 증거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지점에서 루가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군중 일반을 대상으로 독설을 퍼붓는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오복음은 그 대상을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라는 지도층으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 복음저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들은 군중들 속에서 교회가 탄생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세례자 요한은 구질서로 대표되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많은 종교학자들이 현대를 탈기독교시대, 심지어 기독교뿐만 모든 제도 종교들이 쇠퇴하고 있는 탈종교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통계자료를 보면, 기독교뿐만 아니라 천주교, 불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무속 인구와 신흥종교는 증가추세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학자들은 제도종교 인구는 줄었지만, 그렇다고 영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라고 진단합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현상, 즉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트렌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존 종교들이 과거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과 고독감이 심화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현대인들은 당장의 심리적 안정을 주는 무속 그리고 심지어 왜곡된 종교적 가르침으로 미혹하는 사이비종교에 더 깊이 빠져서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혼란이 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2026년을 앞두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2주일! 우리는 다시한번 이새의 뿌리에서 새싹이 돋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혼란한 유다 왕국의 모습에서 잘려나간 나무의 그루터기를 보고 탄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와 새로운 나무로 자랄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계 신자들의 답답한 모습에 힘들어 하면서도 장차 주님의 교회가 온 민족의 교회가 될 거라고 희망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다가오니 옛 삶을 청산하고 세례를 통해 새 삶을 살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는 과거의 어떤 것들을 극복하고 어떠한 모습으로 새로워져야 할까요? 우리는 매년 늘 똑 같은 일상을 겪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은 비슷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새로운 시간,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과도기 속에서 이사야 예언자처럼, 사도 바울처럼, 그리고 세례자 요한처럼 새 희망과 비전을 감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나와 우리 공동체, 우리 나라, 그리고 이 세상은 이새의 그루터기에 나는 새싹을 보고 기뻐하며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경축할 것입니다.

이새의 새싹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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