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20260222 유혹(가해 사순1주일)
작성일 : 2026-02-22       클릭 : 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60222 가해 사순1주일

창세 2:15-17, 3:1-7 / 로마 5:12-19 / 마태 4:1-11

 

유혹

 

지난 주 수요일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르는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40일 동안 사순절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순절이 40일일까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마태 4:2)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동방교회는 400년 이후부터, 서방교회는 700년 이후부터 40일 간 사순절 전례를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가(A)해 사순 1주일 전례독서는 구약성경 첫번째 책인 창세기와 신약성경 첫번째 책인 마태오 복음 모두 유혹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유혹하는 자와 유혹받는 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는 유혹에 넘어갔고,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오늘은 이처럼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유혹을 가지고 왜 하와와 아담은 유혹당했고, 왜 예수님은 유혹을 극복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벌어진 유혹이야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다양한 나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두 나무가 있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과 나무입니다. 여기서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인간은 처음부터 살다가 죽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명나무를 먹을 때마다 유한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창세기 3 22절을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와 아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 때문입니다: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시었다 그러면 하느님은 에덴동산을 왜 그렇게 만드셨던 걸까요? 그것은 한편으론 사람에게 최대한의 것을 허락하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람에게 자신의 한계를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은 야훼 하느님의 명령을 쫓을 것인가, 아니면 거스를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유를 지킬 인간의 역량이 참으로 유리그릇 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혹자가 등장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 유혹자를 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뱀이란 동물은 인간이 보기에 좀 징그러워 보일지 몰라도 엄연히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왜 유혹자를 뱀이라고 번역했을까요? 창세기 저자는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말 안에 있는 동음이어(同音異語)라는 언어유희를 활용했습니다. , 뱀을 히브리어로 나하쉬(נָחָשׁ)’라고 하는데, 청동기 시대에 제사 지낼 때 제사장이 빛을 반사하는 거울로 사용한 구리도 같은 발음인 나하쉬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민수기에 나오는 사막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뱀에 물렸을 때, 구리로 만든 뱀을 보고 죽지 않았다는 구리뱀 이야기입니다. (민수 21:4-9 참조) 이런 맥락에서 유혹자는 뱀이라는 동물은 그저 상징일 뿐, 그 말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주술을 행하는 자이며, 그 주술로 인간을 유혹하여 판단을 흐리게 한 자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 유혹자의 특징을 두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론적으로 볼 때, 유혹자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속성이 간교하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간교하다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그것은 지혜롭다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이 말이 긍정적으로는 신중함과 슬기로움으로 나타나지만, 만약 부정적으로는 교활함과 간교함으로도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지혜로움이 하느님과 연결될 때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하느님을 떠나 자신의 욕망만을 따를 경우에는 부정적으로 발현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뱀으로 상징화된 하느님의 피조물인 유혹자는 왜 아담과 하와를 파멸로 유혹했을까요? 그 내적동기가 뭘까요? 그것은 어쩌면 시기와 질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유혹자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에 질투를 느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 선물까지 향유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더 약이 올랐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남 잘되는 꼴을 눈뜨고 보지 못하겠다는 고약한 심술이 발동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순진한 하와와 아담을 간교한 지혜로 이간질시킵니다.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꼬드깁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창세 3:4-5) 이처럼 유혹자는 인간의 약점을 교묘히 파고 듭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이 똑똑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시는 듯이 나쁘게 표현합니다. 이제 이 유혹 앞에 하느님의 명령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유혹자의 말을 믿을 것인지 인간의 자유는 시험받습니다. 결국 하와는 후자를 선택했고, 배우자인 아담에게도 자신의 선택을 권하고, 아담 역시 그 말에 넘어갑니다. 결과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었습니까? 성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창세 3:7) 하느님의 말씀 대신 뱀의 말을 선택한 결과는 이처럼 참담했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피조물을 사랑하는 지혜가 아니라,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하느님께 보이는 것이 창피하고 두려운 지식만 얻게 된 것입니다. , 신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남은 것은 겉만 보고 판단하는 외적 지식에서 오는 치욕과 두려움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 있는 유혹은 어떠했습니까? 여기서도 유혹자인 악마는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육체적 한계라는 약점을 교묘히 파고들면서 유혹합니다. 예수께서는 오랜 단식으로 몹시 허기지셨습니다. 그때 악마는 허기짐을 유혹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질과 정신을 끊으려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너무 배가 고파서 이 유혹에 굴복하셨다면,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잠시 만족하겠지만,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떨어져 나갔을 것입니다. 이점이 아담과 하와와 다른 예수님의 특징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애초에 하느님과 연결되었지만, 유혹자의 감언이설에 속아 신성한 지식을 잃어버리고, 육적인 지식으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마의 이간질에도 불구하고 인성과 신성과의 결합을 끝까지 유지하셨습니다.

먹을 것을 가지고 유혹하려는 것이 실패하자, 악마는 아예 대놓고 성전이라는 거룩한 공간을 가지고 흥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하자, 마지막으로 악마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 놓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 자신에게만 복종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기와 질투의 끝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이 나에게 조아리고 굴복할 때 맛보는 승리의 쾌감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한 승리일까요? 에덴동산에서 뱀이라는 유혹자는 자신의 감언이설로 아담과 하와의 행복을 망가뜨리고 쾌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결국에 가서는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기에 유혹자의 집요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관계를 더 굳건히 하셨고, 이 굳건함으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힘차게 전하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Howard Gardner)불행한 사람은 갖지 못한 것을 사모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은 자기 욕망이 앞설 때 하느님 말씀이 들리지도 않고,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인간은 부족과 결핍을 느끼는 바로 그 곳에서 유혹과 시험에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나서 그 열매가 탐스럽고 자신을 영리하게 해 줄 것처럼 보였다고 하면서부터 그녀는 거기에 집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에덴동산의 그 풍요로움을 망각한 채, 오직 그것이 부족하고 그것을 채워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욕망과 섞어서 유혹자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다 보니, 하느님의 은혜가 은총으로 느껴지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이 말씀 답게 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기 첫 주일에 우리는 유혹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나의 욕망인지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주님과 일치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시고,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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