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1 가해 사순2주일
창세 12:1-4 / 로마
4:1-5, 13-17 / 요한 3:1-17
하느님의 명(命)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한자를 풀이한 최초의 사전이라 불리는 『설문해자(說文解字)』는 명(命)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습니다: “명은 시킨다는 뜻이며, 구(口)와 영(令)으로 구성된다.” 즉, 명은
입으로 명령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명령을 내리는 주체와 그 명령을 받는 대상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사명(使命)’이란 단어를 쓸 때, 거기에는 명령의 궁극적 주체인 하느님과 그
명령을 수행할 피조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그리고 그 분이 명령하시는 것을
유한한 우리가 금방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그 명령의 의미를 깨우치고 제대로 수행하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면에서 인생이란 하느님의 명을 알아가고 그것을 실천하는 기나긴 여정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孔子)께서도 50세가 되어서야 ‘지천명(知天命)’, 즉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에는 하느님의 명을 들은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니고데모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흔히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있는 분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하느님과 그 분의 명을 알게 되고 수행하게 되었을까요?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래 된 유대교 자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
강 하류 지역 우르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서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필요한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학문, 특별히 점성학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단지 총총한 별들을 감탄하며 탐구한 것을 너머 저 많은 별들을 만드신 분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그렇게 찾던 분이 마침내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고 다음과 같이 명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창세 12:1-3) 이 명령이 바로 아브라함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듣고 그동안 별과 자연을 관찰하던 사람에서 하느님이 약속하신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던 것입니다. 비록, 그
명령을 따라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서 정착하기까지 숱한 역경을 견디면서 때론 인간적 나약함으로 흔들리기도 하였지만, 그의 인생은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한 믿음의 여정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니고데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니고데모는 마르코, 마태오, 루가 등의 공관복음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그것도 세차례에 걸쳐 나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매번 나올 때마다 그의 믿음이 점차 발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가지 중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은 밤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산헤드린 위원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산헤드린(Sanhedrin)은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장을 의장으로 한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예수님 시대 유대교의 최고 종교·사법·행정 의결 기관으로서 종교적 범죄 재판, 율법 해석, 지방의 회당에 대한 감독 등을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서 첫
심문을 받은 곳이 바로 산헤드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예수님 당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위급 인사인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이 예의주시하는 인물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가급적 눈에 띄지
않는 밤에 온 것입니다. 비록 밤에 몰래 왔지만, 그에겐
커다란 모험이었습니다. 어쩌면 그의 양심은 병자를 치유하고 여러가지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다른
유다 지도자처럼 적대적이기 보다는 직접 만나서 예수님의 진면목과 그분이 말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 3: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3:4)라고 되묻습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두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위로부터’라고 말씀하셨는데, 니고데모는
‘다시’라고 이해한 점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공간적 단어인 ‘위’와 시간적 단어인 ‘다시’를
서로 대비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땅의 법칙,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늘의 법칙, 초월적이고 영원한 질서를 말합니다. 반면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순서 속에
갇혀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 사제계급은 부활이나 사후세계 등을 믿지 않고, 오직 이 세상과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축복만이 있다고 주장했기에, ‘위로부터’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깊은 뜻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복음 저자는 이 대화를 통하여 니고데모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들 간의 결정적 차이를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17) 요한복음 저자는 이 선언을 오직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이고, 이 세상에서 복받는 것이 최고이며, 그
축복은 오직 아브라함의 혈통인 유대인들만 해당된다고 철썩 같이 믿어 온 니고데모로 대표되는 편협한 유대교 학자와 나눈 대화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은 당대 최고의 지성이자 권력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유대교의 편협한 민족주의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초월성과 보편성 그리고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교의 진수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대화 이후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의
증언에 따르면, 유다 지도자들이 회의 중에 예수님에 대하여 죄인이라고 단죄할 때,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있소?”
(요한 7:51)라고
용감하게 예수님을 엄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뒤에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액을 준비하여 무덤으로 갔습니다. (요한 19:39 참조) 이처럼 디모데오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명을 조금씩
이해하고 실천하면서 주님의 제자로 변해 갔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회개와 회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회심이란 하느님이 내게 주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동양에선 이것을 ‘복명(復命)’이라고 부릅니다. 즉, 명(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노자의 도덕경 16장을 읽으면서 이점을 더 깊이 이해합니다. 이 부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天物芸芸,各復归其根。归根曰静,是曰復命,復命曰常 知常曰明。不知常 妄作,凶。知常容,容乃公,公乃王,王乃天,天乃道,道乃久,沒身不殆。
천지만물이 무성하면 각각 그 근원으로 돌아가나니,
근원으로 돌아감을 고요함이라 하고, 그것이 복명(復命)이다.
복명이 되면 늘 변함없게 되며, 변함이 없음을 알게 되면
밝게 된다.
이러한 변함없음을 모른다면 경거망동해져서 흉하게 된다.
변함없게 되면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이 넓어지면 공정하게 되며, 공정한 사람만이 왕이 되며,
왕은 하늘이 된다. 그것은 하늘이 바로 도(진리)이며,
이 도는 영원하기에, 육신이 사멸해진다고 한 들 위태롭지
않게 된다.
고대 동양의 현인들은 하늘이 내려 준 본성으로 돌아가야 불안한 내 마음을 평정하게 하고, 변덕이 심한 나를 늘 한결 같은 성품으로 변화시켜 주며, 그럴 때
나는 포용력이고 공정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며, 그런 사람만이 큰 사람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을 알고, 그 도를 깨우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육신과 이 세상을 초월할 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볼 때, 노자의 이러한 통찰은 우리 기독교의 진리와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성경말씀에서 예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묶여서 니고데모처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냐고 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명령은 때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 길은 그 명으로 돌아가는 것, 즉 복명(復命)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진정한 왕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의 도를 알게 되고, 영원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늘이 명하시는 말씀으로 내 인생의 방향을 돌려서 구원의 기쁨을 맛보길 바랍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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