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8 가해 사순3주일
출애 17:1-7 / 로마
5:1-11 / 요한 4:5-42
단절과 소통
초등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어른이 자신의 정원에 들어와 뛰노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나서 높은 담을 쌓고 출입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떠나자 정원에는 더 이상 봄이 오지 않고, 춥고 차가운 바람만 몰아치는 겨울이 계속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장 틈으로 몰래 들어온 아이들 덕분에 정원에 다시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때
정원 주인은 한 아이가 나무에 올라가려다 손에 상처가 나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아이를 도와주면서
그동안 아이들을 못 들어오게 한 자신의 이기심을 뉘우칩니다. 그래서 그는 정원을 허물고 아이들에게 정원에서
다시 뛰놀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이 이야기의 출처를 찾아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1888년 출간한 동화집에 있는 '욕심쟁이 거인(The
Selfish Giant)'이란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원작에는 이 이야기의 뒷부분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
정원 주인이 구부정한 노인이 되었을 때, 나무에 올라가지 못해 울던 그 소년이 다시 나타나서 그를 천국에
있는 자신의 정원으로 인도했다는 내용입니다. 오스카 와일드 작가는 이 동화를 통해 이기적 존재인 인간이
순수한 아이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손바닥에 상처 난 아이라는 은유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구원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한 통신문명의 발달로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사적공간이라는 ‘정원의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방금 소개했던 동화에 등장하는 이기적인 거인의 모습에서 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느낍니다. 더욱이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신봉하는 자유주의는 각자의 담을 쌓고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점점 당연시하는 것 같습니다. 서구에서 발달해서 오늘날 전 세계로 퍼진 이 가치관에 따르자면, 내 인생의 신은 오직 ‘나’이며, ‘나’ 홀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무엇이
되고 싶은 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오직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내 길은 내가 개척한다는, 얼핏 들으면 매우 주체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하느님 없이도 나를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인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이러한 자율적인 개인관은 결국에 가서는 인간의 모든 관계를 거부하고, 우리를 자신 만의
정원 속에 틀어 박혀 사는 이기적이고 고독한 존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물질적인 외형은
멋있어 보일 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추운 겨울과도 같은 심리적 정원 속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신앙은 그러한 단절과 고립된 삶은 불행하고, 소통과
관계를 회복해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그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들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 예입니다.
이 이야기는 두 개의 단절된 모습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민족 간의 단절이고, 다른 하나는 여인과 그 주변과의 단절입니다.
먼저, 민족 간의 단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물을 길으러 우물에 온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는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 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 4:9 참조) 사실, 그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 모두는 이스라엘 12지파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간에 미움의 기원은 예수님 시대로부터 약 1000년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931년 솔로몬왕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왕이 즉위하자, 북쪽 지파사람들이 솔로몬왕이 다른 나라 여인들과 정략결혼으로
말미암아 생긴 우상숭배 문제, 그리고 과도한 세금징수로 인한 민생고(民生苦) 등을 지적하며 시정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 왕은
백성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고, 더 권위적으로 억압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북쪽 지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따로 나라를 세웠는데, 그것이 이스라엘 왕국입니다. 그들은 유다 왕국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그리짐산(Mount Gerizim)에서 성전을 세우고, 솔로몬왕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적 정통성을 부정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분열된 그들은 기원전 722년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왕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기원전 586년
유다 왕국은 바빌론 왕국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그러나 두 왕국이 멸망당했을 때, 앗시리아왕국은 이방민족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주시켜 혼혈화시키는 바람에, 북쪽의
이스라엘 지파는 혈통적으로 단일민족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유다 왕국 사람들은 비록 바빌론으로
강제 유배를 당했지만, 이방민족과 섞이지 않아서 유다 혈통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남쪽 유다 사람들은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을 혼혈인이라고 배척하였고, 급기야 기원전 200년경 유다의 왕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는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구심점인 그리짐산에 있는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간에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음으로 그녀와 주변세계와의 단절입니다. 복음서는 그녀가
우물에 온 시각이 정오 경이었다고 합니다. 그 시간은 식사를 할 시간이고, 햇볕이 뜨거워서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그녀가 우물에 온 이유는 과거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정식 남편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필경 주변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에 시달렸을 겁니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허락되지 않는 당시 사회에서 남자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답답한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았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그녀를 불충실하고 고집 센 여자라고 평가했고, 그녀는 타인의
그런 시선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주변과 담을 쌓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그녀에게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십니다. 그것도 상종할
수 없는 두 민족, 그리고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과 같은 성별구분이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대화가
진전되면서 그녀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녀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를 통해, 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유다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는
이 말의 뉘앙스가 잘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어감(語感)을 살려서 표현해 본다면, ‘유다놈’이라는
경멸적 호칭입니다. 그 후, 살기위해 우물에 와서 수고스럽게
물을 긷는 차원이 아니라 영원한 생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녀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는 일반적인 존칭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녀의 과거 삶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예언자’라는 종교적 존칭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께서 편협한 종교교리를
뛰어넘어 참된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그녀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그녀는 단지 먹고사는 문제에서 출발해서, 자신의
아픈 과거를 치유하고, 삶의 참 의미,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단절을 뛰어넘는 진정한 구원이라는 기쁜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벽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녀는 주변사람들에게 가서 기쁜소식을 알리고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물질문명의 발달로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 우리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니, 주변과 점점 단절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당장 내 목마름을 해결할 물만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물은 당장 급한 현실을 해결할 순 있지만, 영원을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물을 어떻게 길으라는 기술을 알려주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 그녀는 그 이상의 의미를 깨닫고, 마침내 겹겹이 쌓인 단절의 벽을 허물고 소통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
결과는 그녀 한 사람을 넘어 주변사람들까지 변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기적입니다. 전도는 이런 의미에서 삶의 기적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일 삶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유대 놈’, ‘사마리아 놈’ 하면서 으르렁거릴 것이고, 고집세고 행실이 못된 여자라고 손가락질하고 그런 사람들하고 상종하기 싫다고 담쌓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벽을 허무셨습니다. 이것이 기쁜소식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전도요, 선교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동안
담쌓고 단절했던 것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허물어져서, 여러분이 새 사람으로 변하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복음의 전도사가 되길 원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하느님의 집으로 활기찰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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