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빛: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고리(주님의 봉헌축일)
작성일 : 2022-01-30       클릭 : 300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130 주님의 봉헌주일

말라 3:1-5 / 히브 2:11-18 / 루가 2:22-40

 

 

: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고리

 

 

매년 22일은 주의 봉헌축일입니다. 이날 교회는 양초를 축복하고 교회와 가정에서 축성된 초를 켜고 기도를 합니다. 올해는 주의 봉헌축일이 평일에 있어서 주일로 이동하여 이 날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봉헌축일이 왜 22일이며, 이 날에 초를 축성하는 이유에 대하여 일부 교인들이 궁금해 하실 겁니다.

먼저, 22일을 주님의 봉헌축일로 제정한 이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산모가 아들을 낳으면 40, 딸을 낳으면 80일에 부정(不淨)을 씻어야 한다는 정결례(淨潔禮)규정이 있습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성공회 기도서에 있는 <출산감사예식>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부정을 씻어야 한다라는 구절이 현대인에게는 부정적으로 느낄지 모르지만, 의학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고대에는 건강하지 못하거나 약한 상태 역시 부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산 후, 40일 혹은 80일까지는 산모와 아기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질 못하게 하는 일종의 산모보호 규정이자, 새 생명을 보호하고 탄생을 공적으로 축하하는 의식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1225일 아기예수 탄생으로부터 40일인 22일을 주님의 봉헌축일로 제정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초를 봉헌하고 축성하는 관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등이 발명되기 전에 인류는 초로 어둠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전등이 발명되기 전에는 해가 지면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덮여서 사람들에게 심리적 공포와 불안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불을 밝힘으로서 악마가 지배하는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를 밝히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종교예식 안에 도입되었습니다. 물론, 초를 밝혀야 글을 읽을 수 있고 여타의 종교행위를 할 수 있는 실용적 목적도 당연히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약 5세기경부터 초에 대한 여러 가지 행위와 의미가 전례에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대표적 예가 부활절에 밝히는 부활초입니다. 부활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한 제대에 초를 켜는 것 또한 거룩한 예식이 행해지는 것을 경배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밖에 성화와 십자가 등의 성물과 함께 초를 켜놓고 기도를 드리는 것 역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청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한 유다교의 정결례에선 희생과 봉헌의 의미로 양이나 비둘기 등을 번제와 속죄의 제물로 드리지만, 그리스도교에선 빛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단 한번 희생으로 유대교처럼 매번 번제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희생과 봉헌정신을 담고자 그리스도인들은 양초를 봉헌하고 축성합니다. 그래서 원래 이날에 신자들은 새 양초를 구입하거나 집에 있는 양초를 가지고 와서 제대 앞에 봉헌하고 사제의 축성을 받는 <양초축복예식>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해 우리는 주의 봉헌축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전통에 대한 성찰입니다. ‘전통(傳統)’이란 말은 전하여져 내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는 풍습, 문화, 정신가치 등 유형·무형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역사가 오래될수록 전통을 유지하고 계승하려는 경향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은 축척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집단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과정에서 원래의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기도 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요소도 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아 선한 마음이 있지만, 동시에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욕구라는 양면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독서에서 말라기 예언자가 그가 오는 날, …… 레위후손은 순금이나 순은처럼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게 되리라(말라 3:3)”고 예언하고, 복음에서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서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노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전통이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 목적과 다르게 되었고, 그러기에 그들 모두 잘못된 전통을 바로잡고 참된 전통으로 회복되길 갈망했음을 뜻합니다. 이 잘못된 상태를 영적표현으로 어둠 속에 있다’, 혹은 미망(迷妄)에 빠졌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잘못된 전통으로 참된 길을 잃고 생기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말라기 예언자를 비롯하여 시므온과 안나 노인에 이르기까지 깨어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루가 2:25)”고도 전하고 있습니다. 만일, 말라기 예언자, 시므온 그리고 안나와 같은 분들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전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전통으로 알거나 혹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현실에 안주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은 잘 보존함과 동시에 늘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여러 신학명제 중 하나인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는 구절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통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해줍니다.

둘째, 희망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희망을 꿈꾸고, 기도하고, 이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교회는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주의 기도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도 실현되길 희망하고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한 시므온과 안나 두 노인은 일생동안 주님이 약속하신 이 희망을 인내심을 갖고 기도하며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예수를 봉헌하러 성전에 갔을 때,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루가 2:29-30)”

 

그러나 이들이 본 희망은 100% 실현된 종말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의 촛불처럼 이제 막 불이 켜진 양초와 같은 아기예수입니다. 이 아기예수를 만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전 일생을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그들이 평생 기도하며 기다려왔던 것이 고작 연약한 아기란 말인가하고 실망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적인 눈은 이 아기를 통해 앞으로 펼쳐질 하느님의 거대한 구원계획을 본 것입니다. 동시에 그 구원과정이 얼마나 힘들지도 예감합니다. 그러기에 이제 그들은 그 희망의 임무를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건네주면서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루가 2:35)”라고 마음을 굳건히 먹으라고 충고해 줍니다. 이제 구원의 희망을 꿈꾸며 기도하고 노력하는 사명(Mission)’이 두 노인에게서 마리아에게로 건네집니다. 양초의 빛과 같은 가냘픈 아기예수를 매개로 과거와 미래가 연결됩니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구원희망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전통이자, 희망의 계승입니다. 그리고 그 전통과 희망이 오늘 이 자리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옵니다. 우리가 양초를 봉헌하고 우리자신을 봉헌하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새해 첫 주일설교에 저는 교구장 주교의 사목교서를 대독했습니다. 사목교서에서 서울교구는 올해 교구표어를 친교의 신앙으로 선교하는 제자공동체라고 정했습니다. 이어서 교회위원회에서 우리교회 표어로 전통을 계승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로 하고, 올해 우리교회 목표를 강화선교 130주년을 준비하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내년이면 우리교회 설립 130주년이자, 강화에 성공회가 전래된 지 130주년이 됩니다. 더 나아가 신·구교를 통틀어서 강화에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 교회가 세워진지 13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동안 우리교회를 비롯하여 강화지역 성공회교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들 모두 나름 훌륭한 선교역사와 전통을 일구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초기에 가졌던 초심을 잃고 미혹과 나태에 빠진 부끄러움도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교회는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신실한 교인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오늘날까지 신앙의 전통을 이어져 왔습니다.

이제 강화선교역사 130주년을 앞두고 우리교회는 자랑스러운 선교역사전통을 계승하고,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 좀 더 가까이 가려는 미래선교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가 기도하고 준비하는 성지화 사업은 대한성공회 선교역사를 기념하고, 우리성당을 세계교회 속에 자랑스러운 한국교회로 자리매김하는 전통의 계승이자 발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빛을 발견하고 헌신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봉헌축일을 맞이하여 제대 앞에 우리의 초를 봉헌하면서 우리교회를 주님께 봉헌하고, 우리 개인의 삶을 주님께 봉헌합시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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