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그들 간의 화해(다해 사순4주일)
작성일 : 2022-03-27       클릭 : 26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327 다해 사순 제4주일

여호 5:9-12 / 2고린 5:16-21 / 루가 15:1-3, 11-32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그들 간의 화해

 

 

전통적으로 교회는 대림3주일과 사순4주일을 장미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제는 분홍색 영대와 제의를 착용합니다. 보통 대림절과 사순절에 보라색 영대와 제의를 입음으로써 속죄와 회개의 시간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지만, 오늘처럼 대림과 사순 중간에 분홍색 제의를 입음으로써 기쁨의 시간이 곧 도래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대림 장미주일은 필립비서에 나오는 44절의 말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Gaudate in Domino semper)”에 근거하여 '기뻐하라 주일(Gaudate Sunday)'로 부르고, 사순4주일은 이사야서 6610절 말씀, 예루살렘아, 즐거워하라에 근거하여 '즐거워하라 주일(Laetare Sunday)'로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화해에 대한 메시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죄로 인해 멀어진 인간을 성부 하느님과 화해시키신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러한 화해의 이치를 이어받아 실행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제1독서 여호수아서는 다른 각도로 화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 아주 실제적인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우선 히브리백성들에게 있어서 화해란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종살이했던 수모를 벗어나게 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과 동시에, 화해의 결과 히브리백성은 이제 남에게 먹을 것을 얻어먹는 처지에서 벗어나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일해서 소출한 먹거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자립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히브리 백성들에게 있어서 야훼 하느님과 화해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독립과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고, 경제적으로는 남에게 심지어는 하느님이 주시는 만나에만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땅을 갖고 자신의 재산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1독서와 2독서를 통해 화해란 단지 영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우리 현실생활에서도 변화를 동반합니다. 그러기에 사순4주일은 ‘Laetare Sunday(즐거워하라 주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화해에 도달하기까지 어떠한 과정이 있었으며, 화해란 단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만 그치는 건지 아니면 더 나아가 인간 간의 화해는 어떠해야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이것에 대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은 아버지, 큰 아들 그리고 작은 아들입니다.

먼저, 아버지를 봅시다. 동양의 전통적인 부모상은 아버지는 엄하고, 어머니는 자애롭다입니다. ‘엄부자모(嚴父慈母)’는 비단 동양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있는 전통적인 부모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소개하는 아버지는 엄하신 분이라기보다는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재산의 계승자는 큰 아들이고 작은 아들에게 돌아갈 몫은 큰 아들에 비해서 적거나 심지어 안줘도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보면, 작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당돌하게 요구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순순히(!) 그 청을 들어줍니다. 만일 엄격한 아버지라면 둘째 아들의 이런 염치없는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함은 물론 호되게 야단쳤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한 몫 챙긴 둘째아들은 먼 고장으로 가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면서 신나게 재산을 탕진하며 삽니다. 그러다가 돈도 떨어지고 엎친대 덮친 격으로 그 고장에 심한 흉년이 들어 어디 밥 빌어먹을 데도 없는 곤궁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나마 어떤 집에 들어가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동이쳐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철없는 망나니 아들은 세상의 비정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버지께 몹쓸 짓을 했는지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속에서 다 죽게 생긴 그는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하여 염치불구하고 아버지께 돌아가 품꾼이라도 되어 밥이라도 얻어먹기로 합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한 가지 의문점이 들 겁니다. 왜냐하면, 동양사람의 정서상 아무리 망나니짓을 한 자식이라도 이처럼 초라한 몰골이 되어 오면 부모는 어찌되었던 그런 자식을 받아들일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념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계약으로 이루어집니다. 심지어 하느님과 인간도 계약을 맺습니다. 구약에선 야훼 하느님이 백성을 대표하여 시나이 산에 오른 모세와 계약을 맺습니다. 십계명이 바로 그 계약문서입니다. 이처럼 계약은 쌍방 간에 약속한 내용을 충실히 이행할 때만 효력이 발생합니다. 만일 쌍방 중 한쪽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때, 상대방은 약속을 이행할 의무가 없어집니다. 이런 맥락에서 둘째 아들이 자신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계약을 파기하고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입장에서도 그 아들이 죽던지 말든지 상관할 의무가 없는 셈이 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계약문화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계약문화가 밑바탕에 깔린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대하여 동양사람들은 좀 냉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선 이런 계약문화가 사회 구성원들 간에 책임과 권리관계를 좀 더 분명히 하는 긍정적 작용을 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성격은 계약에 충실한 서양사람 정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하는 동양사람 정서에 더 가깝습니다. 아버지는 먼발치에서 상거지로 변한 아들의 몰골을 보고 달려와 끌어안으며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루가 15:24)”라고 기뻐하십니다.

다음으로 두 아들을 보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참으로 철없고, 당돌하고, 주변사람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쫄딱 망하고 배고파 죽게 될 지경에 이르자, 살기 위해 아버지 집에 돌아가 품꾼으로라도 연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진 않지만 당시 풍습으로 볼 때, 재산을 받았을 그 자리에 큰 형도 있었고, 그 자리에서 그는 아버지의 동생이자, 형의 아우라는 법적 지위를 포기하는 계약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도 그렇지만, 형이 더 무서워서 감히 자신의 지위를 복원시켜 달라고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예상치도 못하게 격하게 반겨주시고 신분이 복권되었다는 상징인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발과 새 옷을 입혀주고 잔치를 베풀어주니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밭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오다가 풍악소리를 듣고 하인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큰 아들은 엄청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충실히 지킴은 물론, 가문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였고 재산을 늘리는데 참으로 열과 성을 다했지만 아버지의 행동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아버지의 재산을 자신이 다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철딱서니 없는 동생이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졸랐을 때 아버지가 호되게 야단치지는 못할망정, 자기 재산이나 다름없는 재산을 뚝 잘라서 동생에게 주는 바람에 내심 화가 났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물려받을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생이 그 재산을 받고 나가는 대신, 아들이자 동생이라는 가문의 권리를 포기하는 계약을 했기 때문에 골치 아픈 놈 하나 없어지니 어차피 앓던 이 하나 뽑지하는 심정으로 잊고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슨 황당한 일입니까! 아버지가 자신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 방탕한 놈을 다시 맞아 주시고 잔치까지 베풀어 주시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는 화도 났지만, 이러다 자신의 몫이 또 없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일어났을 겁니다. 큰 아들 입장에서는 동생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것과 그로 인해 자기가 받을 손해 그리고 이를 초래한 아버지의 모습에 대한 원망이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이야기에서 큰 아들이 아버지의 설득에 결국에 가서 어떻게 반응했는지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아마도 그것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한번 생각해 보라고 화두(話頭)’로서 던지신 것 같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서 어떻게 느끼셨나요? 만일 부모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아서 내 자식들을 포용하는 관대한 부모가 되어야지 하고 다짐했을 겁니다. 만일 내 처지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작은 아들의 어려움에 동정이 가면서 아버지가 용서하고 환영해 주는 모습에 감동했을 겁니다. 또 만일 큰 아들 입장에서 들었다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잃었던 아들이야기는 우리를 여러모로 생각하도록 초대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하면서 우리 안에 두 아들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둘째 아들처럼 뻔뻔하게 내 몫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내 욕심대로 살기도 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큰 아들처럼 상대방과 비교하면서 그래도 내가 타인들보다는 더 의롭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이런 나에게 하느님은 왜 복을 인색하게 주시냐고 볼멘소리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루가 15:31)”고 하신 말씀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늘 나와 함께 계시고 예수님의 것이 바로 내 것이라는 이 기쁜 소식을 내가 진실로 깨닫는다면, 우리 각자는 이미 무한한 하늘의 보화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만나를 이미 가지고 있는 부유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화해가 가져오는 진정한 은총의 결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제2독서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2고린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화해한 우리는 이제 사람들과도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즐거워하라 주일인 장미주일! 하느님과 화해하고, 이웃들과 화해하고, 궁극적으로 내 자신과 화해함으로써 즐거워하는 은총이 모든 교우님들에게 임하시길 기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덧글쓰기  

광고성 글이나, 허위사실 유포, 비방글은 사전 동의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베드로 22-04-03 293
다음글 베드로 22-03-20 276


묵상 영성 전례 옮긴글들
이경래 신부 칼럼 김영호 박사 칼럼

홀리로드 커뮤니티

댓글 열전

안녕하세요?선교사님!
정읍시북부노인복지관 멸치 판매..
원주 나눔의집 설명절 선물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