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그 날이 오면(가해 대림3주일)
작성일 : 2022-12-11       클릭 : 308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가해 대림3주일

이사 35:1-10 / 야고 5:7-10 / 마태 11;2-11

 

 

그 날이 오면

 

 

오늘은 장미주일이라고 부르는 대림3주일입니다. 이 날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에 대한 메시지를 줍니다. 그러나 그 희망과 기대를 품었던 현실은 역설적으로 말해 정반대라 할 수 있는 역경과 고난과 인내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했던 메시지는 유다왕국이 주변나라들로부터 위협에 처한 힘든 상황이었고,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상황 속에서 예수께 고대하던 메시아를 물었으며, 야고보서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믿음의 시련을 겪고 있는 속에서 나온 메시지입니다.

저는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할 때 <그날이 오면>이란 시와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학생시절 국어시간에 배운 <상록수>라는 농촌계몽소설을 쓴 심훈(沈熏, 1901~1936)작가님은 일제치하 암흑기에 해방의 꿈을 노래하는 <그날이 오면>이란 시를 쓰셨습니다. 이 시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저는 심훈 선생님의 <그날이 오면>이란 시와 같은 제목이 달린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19876월 최루탄을 맞아가며 이 땅에 민주주의가 실현되길 간절한 마음으로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노래가사의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 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심훈 선생님의 <그날이 오면>이란 시와 80년대 <그날이 오면>이란 노래는 이사야 예언자가 유다민족의 해방을 노래한 오늘 독서말씀처럼 고난 속에서도 반드시 오고야 말 민족의 해방과 그 기쁨 그리고 더 나아가 진정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을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가 간절히 열망했던 유다민족의 이상국가도, 심훈 선생이 학수고대했던 광복의 나라도, 그리고 80년 우리가 외쳤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도 돌이켜 보면, ‘상처뿐인 영광이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가 말해주듯이, 유대민족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다시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다시 복원하려고 했지만, 그리스의 알렉산더대왕과 그 뒤를 이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는 고통을 받게 되는 등, 이사야 예언자가 기대했던 이상국가가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심훈 선생님이 갈망하던 광복의 그날은 왔지만, 우리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크나큰 민족적 비극을 맛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 학생들과 시민들의 희생으로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문민정부를 세워서 모두가 행복할 민주사회를 원했지만,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여전히 힘들고 각박하기만 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했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 11:3)”라는 질문은 시공간을 관통하여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절박합니다. 어쩌면 이 질문은 하느님나라가 임하길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마다 간절하게 물었던 시대적 과제이자, 기도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예부터 지금까지 그 날이 오면을 간절히 원하였고, 그런 날이 와서 우리가 더 이상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꿈꿔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줄 진정한 지도자, 다시 말해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감옥에 갇혀서 자신이 꿈꾸는 하느님나라 운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듣고 그 희망을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례자 요한의 다급한 질문에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장황한 이론적 설명이 아니라, 당신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열거하십니다. 그것은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마태 11: 5)”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의심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의심을 품지 말라는 뜻은 이사야 예언자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이어져 온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활동을 통해 절망하고 낙담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격려하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정신을 초대교회도 이어받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는 박해를 비롯한 주변의 어려운 여건으로 힘들어하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합니다:

 

형제 여러분, 고난을 참고 이겨 낸 사람들의 본보기로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한 예언자들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10, 8)”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까지 인류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 그리고 경제발전이 우리를 진정한 그 날로 인도할 수 있다고 낙관했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낙담하며 예수님께 물었던 그 질문을 여전히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자원을 무분별하게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훼손되어 함께 살아갈 동식물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인간 역시 전대미문의 질병과 환경오염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핵무기를 비롯한 각종 첨단무기들로 인해 과거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각 시대는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그 시대마다 염원하는 그 날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시대적 희망이라고 합니다. 또한 각기 다른 시대적 희망들을 관통하며 연결시켜 주는 근원적 희망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선 이것을 하느님 나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중심에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간을, 더 나아가 모든 존재들이 갈망하는 그 날을 충족시켜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라는 분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온전하게 회복되고 완성되는 그 날그 곳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과 함께 인내하며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과정에서 때론 세례자 요한과 같이 낙담할 때도 있지만,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그 나라의 징표를 보여주시고 믿음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고 우리가 바라는 그 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마침내 이루어질 최종적인 그 날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3주일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를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시간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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