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거룩한 이름 예수축일)
작성일 : 2023-01-01       클릭 : 15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30101 거룩한 이름 예수축일

민수 6:22-27 / 갈라 4:4-7 / 루가 2:15-21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혹시 오리너구리를 보신 적이 있나요? 호주가 원산지인 오리너구리는 부리는 오리모양인데, 수달과 같은 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알을 낳지만 부화하여 새끼가 알에서 나오면 포유류 동물처럼 젖을 먹여 키웁니다. 1799년 영국자연사박물관은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호주에서 보내 온 이상한 동물표본을 받았습니다. 학자들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혹시 진귀한 동물을 보내면 두둑이 보상받는 것을 노리고 하지 않았을까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신체를 이리저리 꿰어서 붙인 가짜일 것이라고 여기고 꿰맨 자국을 열심히 찾았습니다. 그러나 후에 표본을 더 받고 이에 대해 조사한 결과, 결국 생물학자들은 오리너구리를 특이한 포유류로 분류하는데 동의했습니다.

이처럼 양립할 수 없거나 상호배타적일 때 사람들은 이 난제를 풀기위하여 여러 가지 논리와 해석을 시도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선 이 난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으로 믿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역사를 보면, 이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연약한 인간일 수 있다는 것은 신성모독이기에 하느님이 인간의 몸을 빌려 인간인 척만 했고,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도 아픈 척 만 했지, 실지로 예수님은 아무런 고통도 당하시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날 언어로 표현하자면, 예수는 단지 하느님의 아바타(avatar) 내지 가상실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축소하거나 무시하고 신성(神性)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반해서, 이들과 정반대되는 이들은 예수는 신성이 없는 단지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양극단의 입장 사이에서 어떤 이들은 예수는 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천사 비슷한 신과 인간의 중간자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과 갈등들에 대하여 451년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요, 동시에 참 인간이시다는 것을 정통교리로 확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 때마다 신경(信經)을 통하여 이것을 거듭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서로 상반된 속성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고 전하는 태도에 대하여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목동들이 하늘에서 본 초자연적인 계시를 확인하러 베들레헴에 있는 한 마구간으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부모를 비롯해 주변사람들에게 그들이 듣고 본 신비스런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이 광경은 우리 신앙에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그것은 신앙은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차원과 연결된다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사는 삶의 현장과도 긴밀히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목동이 그날 밤, 하늘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현상에 감탄하고 거기서 끝났다면, 그것은 일종의 신기한 경험일진 몰라도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진정한 종교체험일 순 없습니다. 그들이 그 광경을 목도하고 마구간에 와서 기쁜 소식을 찾고 전했을 때, 비로소 신비는 현실이 됩니다. 마치,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인 것, 초월적인 것, 영적인 것, 저 세상의 것만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만 탐닉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순수한 영혼도, 오로지 물질 덩어리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이해하는 인간은 유한한 육체라는 물질과 무한을 갈망하는 영혼이 통합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온전히 구현하신 분이십니다. 목동들은 아기예수를 찾아서 봄으로써 그들이 접했던 초자연적인 계시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성육신은 단지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차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동들에게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 더 나아가 베들레헴 사람들에도 전해집니다. 이 전해지는 과정! 이것이 바로 선교(Mission)입니다.

이와 같이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선교를 함에 있어서 설령 우리가 그 신비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목동들처럼 자신들이 체험하고 만난 것을 전하면 됩니다. 또는 그 계시를 접하고 성모 마리아처럼 마음에 새겨 곰곰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신비는 한 번에 명료하게 파악된다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그 의미를 깨닫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1고린 13:11)”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새해 첫날 교회는 제일 먼저 예수를 거룩한 이름으로 기념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제도나 법이나 그 밖의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과 무관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고난의 세상 가운데서 은총과 자비의 하느님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지만, 동시에 당신과 다른 사람들이 고난과 박해를 받을 거라고 예견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만사가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으며, 하느님께 순종하면 삶이 달콤함과 즐거움으로 채워질 거라는 식의 환상을 심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심판의 날에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는 소돔보다 더 견디기 힘든 벌을 받을 거라고 경고하셨습니다.(루가 10:12 참조) 다시 말해 예수님의 메시지는 종말과 심판의 때가 다가왔으니 우리가 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 걸어라고 촉구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진보적인 분이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정의, 신실함 등의 고귀한 가치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보수적인 분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진보와 보수가 만나고, 신성과 인성이 일치를 이룹니다.

새해 첫날 우리가 예수를 거룩한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세상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현실을 외면하고 비현실적인 신비만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을 결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하느님나라를 위해 이 세상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신 하느님의 성육신(聖肉身)의 길을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목동들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도 전해지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그 소식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교회와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 성육신(incarnation)되길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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