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가다, 씻다, 보다, 돌아오다(가해 사순4주일)
작성일 : 2023-03-19       클릭 : 120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319 가해 사순4주일

사무상 16:1-13 /에페 5:8-14 / 요한 9:1-41

 

가다, 씻다, 보다, 돌아오다

 

여러분은 혹시 <실로암>이란 복음성가를 들어 보신 적이 있나요? 1981년 신상근 목사님이 자신의 신앙고백이 담긴 1절과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사 작곡한 대한민국의 고전적인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입니다. 이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찾아 떠난다. 종이 울리고 닭이 울어도 내 눈에 오직 밤이었소.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는 차가운 새벽이었소. 주님 맘 속에 사랑 있음을 나는 느낄 수가 있었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하리라. 실로암 내게 주심을

나에게 영원한 사랑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들은 이 복음이야기에는 주인공 예수님과 눈뜬 장님을 중심으로 그들의 부모, 군중들,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 등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합니다. 요한 복음 이야기 중에서 아마도 제일 역동적인 전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중에서 요한복음 9 7절의 말씀, “소경은 가서 얼굴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왔다”라는 구절에 나오는 ‘가다, 씻다. 보다, 돌아오다’라는 4개의 동사를 중심으로 오늘 복음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가다’입니다. 여기 태어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한번도 사물을 본 적도, 아름다운 빛을 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태초에 세상만물이 창조되기 전, 암흑의 혼돈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아 흙을 개어서 소경의 눈을 바르십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드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 소경에게는 이것이 두번째 창조사건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소경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흙으로 빚으심으로써 먼 옛날 창조주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재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생명을 주러 인간에게 먼저 가십니다. 이리하여 재창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이란 창조의 또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 단계는 ‘씻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요한 9:7)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실로암을 ‘파견된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성경을 좀 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파견된 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생물인 물이 파견됩니까? 요한복음 저자는 실로암이란 이름이 갖고 있는 상징을 통해 사실 이 물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 즉 성부 아버지께로부터 파견 받아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난 주일복음에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신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로 말씀하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인간이 하느님의 숨결로 생명을 얻었듯이, 이제 눈에 진흙을 바른 소경도 생명의 물이신 그리스도에게 가서 씻음을 받음으로써 생명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셋째 단계는 ‘보다’입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씻은 그는 이제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만물과 온갖 빛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엄청난 놀라움과 기쁨을 체험했을 겁니다. 마치 창세기에 아담이 하느님의 숨결로 생명을 얻어 눈을 뜨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경이롭고 신기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와 오늘 복음 간에는 매우 대조적인 주변 광경이 펼쳐집니다. 창세기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갖가지 동물과 식물 그리고 아담의 반려자 이브 등 모든 것이 참으로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지만, 오늘 복음은 새로 태어난 그 사람에게 “저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닌가?(요한 9:8)라고 빈정거림이 담겨있는 놀람에다, 안식일에 쉬라는 율법을 어긴 예수님과 그 사람을 비난하는 악의로 가득 찬 세계입니다. 이처럼 원죄 이전의 세상과 원죄 이후의 세계가 너무나 극명하게 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죄로 뒤덮인 세상안에서 치유는 찬양이 아닌 분열을 가져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 우리시대나 별반 다르지 않은 죄로 오염된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눈이 먼 상태에서 눈이 떠져 볼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면에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적 의미에서 ‘본다’는 것은 진리에 눈을 떴다는 것이요, 그것은 동시에 거짓과 기만을 잘 식별할 수 있는 영적 시야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눈을 뜬 그 사람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처럼 법과 신학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도자들의 비판과 심문에 당당히 사실과 진리를 증언합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이 심문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굽히지 않자, 이제 그의 부모를 데리고 와서 겁박 합니다. 그러자 겁먹은 부모는 자신은 모르니 다 큰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회피해 버립니다. 결국 서슬 퍼런 공권력 앞에 입을 닫아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한편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어겼으니 예수는 하느님에게서 온 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가 행한 놀라운 기적을 보면 죄인일 리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을 진리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는 동시에, 도그마와 고집에 사로잡힌 거짓세계에 충격을 주고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돌아오다’입니다. 유다인 지도자들로부터 쫓김을 당한 그 사람은 다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전에는 단지 자신의 육체적인 눈이 떠지는 기적을 체험하고 그 사실을 증언했지만, 유대인들과 논쟁을 통해서 점차 영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과 다시 만났을 때, 예수님께 “주님, 믿습니다.(요한 9:38)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유대교의신앙 틀이라는 교조적인 모습에서 해방되어 예수님을 구세주요,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복음 이야기는 단지 실로암 근처에서 기적을 체험한 한 사람의 경험이야기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4가지 단계 그리고 그 속에서 변화되고, 주변의 유대인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마침내 그들과 결별하여 ‘교회(敎會)’를 이룬 초대교회 시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간증도 내포하였던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 복음도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고 새로운 인간이 되었는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2000년 전 예수님 시대 그리고 초대교회 시기의 간증 이야기로만 멈추어 있진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땅을 넘어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이야기인 것입니다. 과거 이 땅의 선조들도 예수님을 영접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이러한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앎으로써 받은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변의 냉대를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고, 오히려 힘차게 예수는 구세주시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선조들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시냐고.

흑암의 세계로부터 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예수님의 손길이 우리를 만져주시길 실로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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