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어떻게 이 여인이 이리도 바뀌었을까?(가해 사순3주일)
작성일 : 2023-03-12       클릭 : 113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0230312 가해 사순3주일

출애17:1-7 / 로마5:1-11/ 요한4:5-42

 

 

어떻게 이 여인이 이리도 바뀌었을까?

 

 

심리학에서 투사(projection)’미러링(Mirroring)’이란 서로 상반된 개념이 있습니다.투사(投射)는 자신의 모습이나 욕망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남에게 투사해서 자신을 방어하는 심리입니다.예컨대,나 자신을 반성하는 대신 나와 비슷한 부분을 갖고 있는 상대를 보면서 나 대신 상대를 비난합니다.이에 반해 미러링(鏡像)은 자신과 상대방이 서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거나,상대방이 나타내는 감정에 공감하는 심리입니다.예를 들어,상대방이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고, 상대방이 웃으면 나도 웃게 됩니다.그래서 미러링은 상호작용과 감정적 연결성을 나타내는 심리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우리 같은 외국인들이 볼 때,같은 종교,같은 인종이었지만서로를절대로 수용하지 못하는,아니 서로를 지독히도 경멸하는 사이였습니다.사실,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같은 야훼 하느님을 섬기고, 비록 일부 차이가 있지만 유사한 경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이 서로 갈라져서 이민족들에게 멸망 당하는 역사적 과정 속에서 서로를 투사하는 방어기제가 형성되었습니다.이런 이유로 예루살렘과 북쪽 갈릴리 지방을 왕래할 때 소위 경건하다는 유대인들은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 지방을 우회해서 다닌다고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오늘 복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사마리아여인과 예수님과의 대면에 주목해 봅시다.아침 일찍 유대지역을 떠난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지역 야곱의 우물가에 도착했을 때, 정오 무렵이었습니다.햇볕이 쨍쨍 내리쬐는팔레스타인의 무더운 더위에 쉬지 않고 걸었기에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을 것입니다.그래서 제자들은 먹을거리를 사러 시내에 가고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쉬고 있었습니다.그때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우물로 나왔습니다.그런데 해가 뜨거울 때 홀로 물을 길으러 나왔다는 것은 그 여인이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어했고,사람들도 그녀와 어울리기 싫어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합니다.그 이유는 그녀가 다섯 명의 남자가 있었고,지금 같이 살고 있는 여섯 번째 남자가 있으니 동네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았을 것을 능히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말을 거십니다.얼핏,일종의 수작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여인은 예수께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 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요한 4:9)라고 대꾸합니다.이 말은 당신은 유다인 남자이고,나는 사마리아 여자이니 서로 상종하지 말자는 뜻입니다.이 말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과 달리 헤픈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그러자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자신에게 생수를 청했을 거라고 재차 대화를 이어 가십니다.처음에 당신은 유다인 남자라서 상종할 수 없다고 철벽을 치던 여인은 선생님이라고 조금 완화된 호칭을 쓰긴 했지만,우물을 앞에 두고 물을 길어 자기 목도 축이지 못하면서 허세를 부린다고 여기고,그런 물이 있다면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다며 예수님의 말씀을 농으로 되받아 칩니다.그때 예수께서는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그 여자의 급소를건드리십니다.당시 부인들은 남편을 나의 주인이라고 불렀던 점에 비춰 봤을 때,자신과 대면하기를 꺼렸던 여인에게 그러면 너의 주인과 대화하겠다는 예수님의 요구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여인의 입장에 보면,자신의 치부가 드러날 수도 있고 그래서 꽤 무례한 요구에 욕을 해주고 그 자리를 피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그러나 그녀는 얘기를 중단하기보다는 나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는 남편이 없어요라고 자신의 처지를 털어 놓습니다.왜 그랬을까요?실상 이 여인은 깊은 속내를 함께 나눌 나의 주인이 없이 공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그러면서 그런 자신의 내면을 기가 막히게 맞춘 예수님을 향하여 예언자라고합니다.그리곤 생뚱맞게 예배장소로 화제(話題)를 바꿉니다.어쩌면 그녀는 진정한 주인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왜냐하면 주인을 찾아 여섯 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만나 보았지만,그들에게 기댈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한 그녀는 참으로 기댈 수 있는 존재를 마음 속 깊이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 여인은 진심으로 자기 삶을 함께 나눌 그의 주인을 찾고 싶었습니다.그렇지만,그녀가찾는 것은 유다의 예루살렘 인가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짐 산인가 등 여전히 자신들만의 종교전통과 보이는 물질세계에 갇혀 있었습니다.이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영적인 차원과 그러한 예배에 대하여 알려주시며 마지막으로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라고 당신을 계시하십니다.이 말씀은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을 처음으로 만나서 그 분의 정체를 묻자 나는 나다(I AM THATI AM)”라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예수를 유대남자,선생님 혹은 자기 과거와 내면을 잘 맞추는 예언자를 넘어서 구세주’,즉 그리스도라는 인식에까지 도달합니다.

다음으로 그 여인을 포함한 사마리아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로 시야를 넓혀 봅시다.예수님을 통해 커다란 깨우침을 얻은 그녀는 이제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전도(傳道)합니다. ‘물동이를 버려 둔 행위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그녀도 마침내 예수의 제자들과 같은 행동,다시 말해,예수를 믿고 따르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유대인들과 상종하기 꺼려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이제 그리스도의 구원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남자와 여자의 벽을 허물고 모든 이에게 퍼지게 된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우물()’이란 장소는 우리 신앙에 여러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우물은 갈증을 풀어주고 생명을 공급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장소입니다.또한 우물물을 길으러 그 물을 볼 때,우리는 거기에 비친 내 모습을 봅니다.만일 우물물이 혼탁하면 내 모습이 잘 안보일 수 있고,또 만일 우물물에 파장이 일면 내 모습이 일그러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교회는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공급하는 우물이라고 하겠습니다.거기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인 주님을만나고예배하며 만족을 채웁니다.또한 기도 중에 내면의 우물물을 통해 내 모습을 드려다 보기도 합니다.그렇지만 만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막 대면했을 때 그녀가 투사라는 방어기제로 벽을 쳤던 것처럼, 교회도 때로는 서로를 투사하며 벽을 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마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같은 주님을 모시면서도 상종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그러나 예수님과 깊은대화를 통해 마음이 열리고 미러링이 되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사람들을 모은 그 여인처럼, 교회는 주님을 깊이 만나면 만날수록 예수님을 닮아가는 공동체로 변해야 할 것입니다.그럴 때 교회는 구원이 이루어지는곳,영원한 생명이 계속해서 나오는 생명의 우물이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당신의 제자로 변화시킨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내려지길 바라며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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