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일상과 부르심(가해 연중10주일)
작성일 : 2023-06-12       클릭 : 92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30611 가해 연중10주일

창세 18:1-15/로마 5:1-8/마태 9:35-10:8

 

일상(日常)과 부르심(Calling)

 

 

우리는 작년 겨울 대림시기부터 지난 주일 삼위일체대축일까지 교회력을 통하여 우리를 위한 주님의 구원 여정을 함께 걸었습니다. 이제 이 과정을 한 번 간략하게 회고해 봅시다. 먼저 대림절 동안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에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느님을 기뻐했습니다. 그런 다음 사순절 동안, 그 하느님이 어떻게 고난 받으셨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 묵상했습니다. 그렇지만, 부활절에 죽으셨던 하느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심에 환호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절에 이러한 모든 구원사역을 마감하신 주님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그 구원의 선물을 전달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그 분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임을 깨닫고 경배 드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구원 여정을 순례한 우리는 이제 다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와 그 속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살아가는 연중시기를 보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마태오를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나이가 “거의 백세에 가까워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고, 그의 아내 사라의 몸도 아기를 바랄 수 없었다(로마 4:19)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1독서 창세기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부르셨을 때는 아마도 그 보다 젊었지만, 그래도 고령의 나이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꿨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고 아주 쉽지 않은 결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부르십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마태 9:9 참조) 여기서 우리는 마태오를 부르신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반도(半島)국가지만, 휴전선으로 분단되어 있어서 사실상 섬나라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땅에 국경선이 있는 국가는 국경도시에 세관이 있어서 이 곳을 통과해 들어오는 사람과 상품에 통행세와 통관세를 매기는 세관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영주들이 다스리는 경계지역 도시에는 세관이 있었고, 갈릴래아, 사마리아, 유다 그리고 인근 지역으로 이동할 때 세관을 거쳐야 했습니다. 마태오는 여기서 근무하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관세와 통행세를 거두는 권한은 입찰제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금액으로 낙찰 받은 사람이 세금을 거두어 통치자에게 바치고, 그 책무를 이행할 수 있는 권한까지 위임받았습니다. 만일 세금이 잘 안 걷혀 부족하게 되면 개인재산으로 채워 넣어야 했기 때문에, 보통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두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일반사람들은 세리들이 정해진 세율보다 더 많이 거두어들여 개인적으로 착복한다고 의심했고, 그들이 무역으로 오가는 다른 민족 사람들과 접촉했기 때문에 당시 유대교 율법에 따라 부정한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배경을 감안하고 오늘 복음을 볼 때, 아마도 유대인 마태오는 돈을 벌기 위하여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유대교의 율법과 동족들로부터 존중은커녕 멸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에겐 이러한 냉랭한 외부의 시선도 힘들었지만, 내적으로도 자신이 정녕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하는 깊은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 그에게 당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시고, 사람들이 죄인의 집이라고 하는 그의 집에 기꺼이 오셔서 식사를 하시니, 어두웠던 그의 마음은 밝아지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유대교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자로 자처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난하자, 주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는 격언과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구약의 호세아 예언서를 인용하시며 율법학자들의 단죄를 정면으로 반박하시며 마태오를 변호하십니다. (마 태 9:12-13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마태오는 나를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어떤 사람을 법과 여론으로 매장할 때, 이들의 공격에 대하여 법이면 법, 지식이면 지식으로 공격당하는 사람의 인권을 옹호하는 양심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의 언행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은 마태오를 부르셔서 그를 다시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씌워져 있는 불결한 사람이란 오명(汚名)도 벗겨 주십니다. 마태오를 부르심으로 그의 부정한 평판을 치유시켜 주셨다면, 오늘 복음의 나머지 부분에서 주님은 하열병 앓던 여인의 몸의 부정도 치유해 주십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하혈을 하면 불결해서 예식에 참여할 수 없었고, 피가 멈추더라도 7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의 경우, 성전에 갈 수도 없었고, 공동체로부터 늘 떨어져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서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회당장의 딸도 소생시킴으로써 절망한 가족들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각자의 삶은 다양합니다. 그래서 획일화된 잣대로 값을 매겨 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일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접하는 인생의 고뇌와 문제들도 다들 실존적으로 심각한 사안들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답을 찾는 등 고군분투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답을 못 찾고 큰 실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설사 겉으로 보기에 성공한 것 같지만, 심적으로 말못할 인생의 문제들과 씨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등장한 아브라함과 마태오는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볼 때 어느정도 부를 일군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인생의 가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늘 뭔가 갈망하고 찾던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이와 달리, 하혈병을 앓던 여인과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회당장에게는 당장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을 벗어나게 해 줄 치유자이자 구원자가 절실했습니다. 우리 삶도 각자 상황에 따라 필요로 하는 내용이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삶의 근저에는 믿음과 희망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설령 어떤 건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더라도 나를 더 나은 상태로 이끌어 줄 그 무엇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런 존재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마태오는 그것을 찾고 기다렸기에,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하열병 걸린 여인도 그 믿음이 있었기에, 주님을 통해 그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회당장도 그 믿음이 있었기에, 희망이 현실로 되었습니다.

이제 성경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무엇을 희망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희망을 믿고 계십니까? 오늘 예배를 통해서 주님께 그 믿음과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일상을 살면서 우리가 하는 기도 속에 주님의 부르심을 느끼길 바랍니다. 나이 든 아브라함에게, 세리 마태오에게, 병을 앓던 여인에게, 가족을 잃은 회당장에게 주님이 부르시고 그들이 응답했듯이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일상을 통하여 그 부르심에 응답하시길 바라며 주님의 이름의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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