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06 다해 연중 제5주일 이사 6:1-13 / 1고린 15:1-11 / 루가 5:1-11 소명(召命)에 대하여 우리 교회는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성공회 형제자매 교회 간의 상통과 일치를 위한 4가지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세계 성공회 협의회(Anglican Consultative Council 약칭:ACC)’가 있습니다. ACC는 주교, 사제,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공회 내·외적으로 직면하는 다양한 사안들에 대하여 함께 모여 논의하고 연구하고 조언해주는 곳입니다. 2016년 ACC에서 <제자도와 제자삼기(Intentional Discipleship and Disciple-Making)>란 제목으로 공식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문서는 성공회 신자가 단지 ‘신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되어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세계 성공회 선교정신에 호응하여 서울교구는 최근 몇 년간 교구표어를 “신자에서 제자로!”로 정하고 수동적인 신자의 모습에서 적극적인 제자의 태도로 전환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믿는 이들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온 선교구호가 아닙니다. 이것의 근원은 예수님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관심을 보였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 부르심에 문자 그대로 그분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calling)'과 '따름(following)'은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동일한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물리적인 부르심과 따름을 넘어섭니다. 거기에는 한 사람의 삶의 방식과 세계관, 철저한 회개, 다시 말해 자아의 총체적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소명이 있다고 바로 “예”라는 응답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부르심과 따름이 단번에 일회성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 나오는 이사야의 소명 이야기와 베드로와 제자들의 소명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부르심과 따름이 어떻게 점차 성숙되어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거룩함의 체험’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야훼 하느님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분 주위에 6명의 천사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다(이사 6:3)”라고 외치는 신비한 환시를 봅니다. 종교학에선 인간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러한 신적인 초월성과 거룩함의 체험을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본질적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초월적이고 신비한 체험이 제2독서 사도바울의 증언에도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그리고 오백 명이 넘는 신자들에게도 나타나셨으며, 마지막으로 교회를 박해했던 자신에게까지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초월적이고 신비한 체험은 우리 신앙의 밑바탕에 있는 원초적 경험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체험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야기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그 거룩함을 보여줍니다. 고기잡이 경험이 없으신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4)”라고 하시자, 고기잡이 경험이 많은 그는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루가 5:5)”라고 대답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필시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고기 잡는 기술과 경험은 내가 당신보다 훨씬 많은데,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니, 참! 뭘 모르시네.”, 그렇지만 그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루가 5:5)”하고 내심 못이기는 척 따릅니다. 그런데 “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루가 5:6)” 예수님은 이처럼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서 기적과도 같은 고기잡이 사건을 통하여 거룩함과 신성함을 드러내십니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초월은 이사야의 환시와 사도바울의 증언처럼 초월적 모습으로도 계시될 수 있고, 고기잡이 사건처럼 일상에서 기적과도 같은 뜻밖의 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공포가 아닙니다. 종교학에선 이것을 ‘경외(敬畏)’라고 부릅니다. 즉, 초월적이고 거룩한 존재와 만날 때, 인간이 느끼는 두려우면서도 공경하는 감정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거룩한 하느님과 천사들을 보고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서 앞이 보이질 않았다고 합니다.(사도 9:8 참조) 또한 베드로도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 떠나 주십시오(루가 5:8)”하고 겁을 먹고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선 이것을 ‘정화(淨化)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기적이고 여러 가지 편견과 욕망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거룩하고 초월하신 하느님을 만났을 때, 평소에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의 부름에 몸을 숨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신앙인들이 30일 혹은 40일간 철저한 침묵과 깊은 기도를 하는 대피정을 할 때도 생기는 영적체험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서와 영적체험에서 나타나는 이 현상에 근거하여 영성가들과 신학자들은 인간이 죽은 다음 빛이신 하느님을 만날 때, 아마도 우리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면서 당혹스럽고 힘든 정화의 시간을 보낼 거라고 유추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치유’, ‘부르심’, 그리고 ‘응답’입니다. 자신의 유한함과 죄 때문에 위축된 이사야에게 천사는 뜨거운 돌로 그의 입을 치유해 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이사 6:8)”하고 말씀하시자, 이사야 예언자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 6:8)”하고 응답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루가 5:10)”하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루가 5:11)” 이상과 같이 제자가 되는 소명은 3단계로 전개됩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전통은 이것을 거룩한 하느님의 빛을 체험하는 ‘조명(照明)의 단계’, 그 빛 속에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정화(淨化)의 단계’, 그리고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제자가 되는 ‘일치(一致)의 단계’로 발전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제자,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그리스도교 영성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위대한 종교와 영성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럼, 그리스도교 소명만의 독특함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사랑의 소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 5장1절에서 11절과 요한복음 21장 1절에서 9절을 비교해 보면, 그리스도교의 소명의 특징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두 이야기 모두 그 구조가 비슷합니다.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못 잡은 상태였고, 그러자 예수께서 그물을 다른 곳에 던져 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 사이의 차이점은 루가복음에선 베드로가 두려워 떨면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요한복음에선 그가 주님을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려고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식사합니다. 식후에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어보실 때 마다 베드로는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와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고기 잡는 이야기에서 왜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세 번씩이나 사랑한다고 고백했을까요? 그것은 두 사건 사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산전수전 다양한 삶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는 제자들이 스승의 십자가 사건 앞에 처절하게 무너진 자신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연약함 가운데 에서도 잊을 수 없는 스승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부활하신 예수님과 다시 만남을 통해 참 사랑의 소명을 깨우쳤기 때문이 아닐까요?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신앙인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교회가 큰 위기라고 합니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의 속도를 못 쫓아가는 것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질 못하고, 때로는 세상의 윤리기준에도 못 미치는 행동으로 냉소와 지탄을 받는 것입니다. 교단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각기 나름의 해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공회가 ‘제자도와 제자삼기’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좌표가 흔들리는 이 때,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이 그 부르심에 응답한 ‘소명’이라는 원초적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치유 받고, 그 부르심에 다시한번 “예”라고 응답합시다. 때론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삶의 십자가 앞에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을 찾읍시다. 그럴 때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사랑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힘을 내어 다시 일상을 살아갑시다. 설교를 마무리하며 특별히 저와 우리 성직자들, 그리고 신학생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연약한 죄인을 당신교회의 제자로 불러주신 주님께서 저희들이 그 소명에 충실하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잘 증거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부르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