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케리그마와 향유(다해 사순5주일)
작성일 : 2022-04-03       클릭 : 291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403 다해 사순 제5주일

이사 43:16-21 / 필립 3:4-14 / 요한 12:1-8

 

 

케리그마와 향유

 

신학용어 중에 케리그마(Κηρυγμα)’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공적인 선포혹은 설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에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후에 베드로가 군중들 앞에서 한 설교(사도 2:14-36)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당시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나자렛 사람 예수는 하느님이 예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분이시며, 이 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느님 오른편에 오르시어 그리스도, 즉 구세주가 되셨다는 증언입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선포하고 설교하는 핵심인 케리그마입니다. 이 케리그마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나자렛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다!”입니다.

그런데 이 케리그마를 가장 열정적이고 체계적으로 선포한 사람은 열두 사도가 아니라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 이유는 사실, 그가 예수님을 살아생전에 육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는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이자, 당대 최고의 유대교 학자 가믈리엘로부터 교육받았으며, 해외에서 살아서 당시 세계어인 헬라어도 자유롭게 구사하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시민권자이자 독실한 유대교도인 그의 입장에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단죄 받아야 할 이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갑자기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광경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반짝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커스로 데리고 갔다.(사도 9:3-8)

 

그 후 일련의 수행과 교회공동체와 접촉을 거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교 박해자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에 초석을 놓는 위대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열두 사도들처럼 예수와 밥 한번 먹은 적도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비전을 잘 이해하였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실현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 특히 예전에 예수님과 밥도 먹고 동거 동락했던 제자들과 신자들로부터 늘 견제와 모함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피력합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항변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필립 3:4)

 

그렇지만 곧 이어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이후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필립 3:8)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예수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누구 자식이며, 무슨 기적을 했고, 나와 인간적 관계가 어떤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포(케리그마)를 핵심가치로 여기고 이를 위해 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내 존재가 온전히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 역시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변한 여인과 여전히 변하지 못하고 있는 주변인물간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걸쳐 모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선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랐다고 묘사한 반면, 루가와 요한은 여인이 기름을 예수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루가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이 일이 일어났다고 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에선 베다니아 지방 어느 집에서 나자로,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 남매 중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발라드린 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복음서에선 제자들이라고 뭉뚱그려 말한 것과 달리 요한복음은 마리아를 책망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유다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복음저자들마다 약간씩 강조점이 달라서 일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가롯유다입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는 혁명당원 출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 혁명당원이란 로마의 압제에 벗어나기 위하여 로마인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을 제거했던 사람들입니다. 지배자 입장에서 보면 테러리스트이고, 유대인 입장에선 독립투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독립투사라고 해서 모두 의롭고 선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정치적 야심가나 물질적 이익에 약삭빠른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가롯유다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한 여인이 예수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눈물을 흘리며 닦아드린 것을 보고 가난한 사람 운운하며 비판했지만, 그것은 겉에 내세운 핑계이고 사실은 그 돈을 자신과 자신이 원하는 곳에 써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니 아까웠을 겁니다.

다음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루가복음에 나오는 시몬의 경우, 저 여자가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데(루가 7:39)”하고 속으로 예수님을 경멸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가 예수님 발 앞에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느끼고, 마음 아파하는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 여자의 과거모습에 사로잡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여전히 과거에 발목이 사로잡힌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 향유를 발라드린 여인과 예수님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선 어떤 여인이라고 하는데 반해, 요한복음에선 그 여인을 나자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지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여인이 되었건 마리아가 되었건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삶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시몬의 말대로 그녀가 과거 행실이 안 좋았다면 그녀는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거고, 나자로의 동생 마리아라면 사랑하는 오빠를 죽음에서 구해내신 예수님께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으며,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베다니아에서 마지막 작별에 앞서 지극정성으로 이별예식을 해드렸던 것입니다. 그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그 어떤 권력도 없는 그녀이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별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주가 지나면 우리는 예수님 생애의 가장 클라이맥스라고 하는 성주간을 보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처럼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아파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예수님의 수난을 대하여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러한 진솔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참된 인생의 의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심(conversion)’이라고 부릅니다.

이 회심이야말로 바로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 중 하나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회심으로부터 사도바울에 회심을 거쳐 교회는 지금 이 순간까지, 아니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회심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오직 회심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여인처럼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으며, 사도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불꽃처럼 태울 수 있게 됩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향해 가는 사순5주일!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닦았던 이 여인처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했던 사도 바울처럼 그런 회심의 은총을 간구합시다. 가롯유다와 바리사이파 시몬이 갖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만나고 변화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회개로 초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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