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래 신부 칼럼  
 

사랑하면 만나리라!(다해 부활대축일)
작성일 : 2022-04-17       클릭 : 271     추천 : 0

작성자 베드로  

220327 다해 부활대축일

사도 10:34-43 / 1고린 15:19-26 / 요한 20:1-18

 

 

사랑하면 만나리라!

 

부활밤 전례는 평소와 달리 많은 독서를 읽습니다. 창조에서부터 노아의 홍수, 출애굽 사건을 거쳐서 이스라엘 유배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기나긴 역사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구원역사는 우주에서부터 인류에게로 그리고 다시 좁혀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에게로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라는 한 존재로 그 초점이 좁혀집니다. 마치 원거리에서 근거리 그리고 초근거리로 카메라의 초점이 좁혀지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부활밤 독서를 들을 때마다 공간적으로는 우주 저 멀리에서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이 지구로, 그리고 중동에 있는 이스라엘 땅으로 그리고 다시 그곳에 사신 예수님 머리 위로 근접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태초 우주가 빅뱅으로 생겨나는 때부터 예수님 시대까지 타임머신을 타고 빠르게 흘러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참으로 스케일이 장대하면서도 세밀한 하느님의 구원섭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태초부터 예정되었던 이 엄청난 구원역사가 한밤중에 일어난 후, 오늘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예수님 무덤에 왔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빈 무덤 사건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예루살렘 지역의 매장환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기후와 토양이 우리나라와 달라서 매장방법도 달랐습니다. 그곳은 건조하고 돌이 많은 지역이라서 굴을 파서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다음, 사람 키보다도 큰 둥그런 돌로 입구를 막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서에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 여인들이 그 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려내 줄 사람이 있을까요?(마르 16:3)”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4 복음서마다 예수님 부활의 첫 목격담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모두 무덤이 비었다는 증언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 간의 만남을 소상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여성의 증언을 증언으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여성의 인권이 인정받지 못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을 첫 목격자로, 그것도 회개하기 이전에 그리 행실이 좋지 못했다고 알려진 막달라 지방 출신 마리아와 예수님 간에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서술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누구보다도 믿음이 돈독해서였을까요? 아니면 다른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존경심이 깊어서일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녀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 옆을 지켰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자리엔 남성제자인 요한도 있었는데, 굳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첫 목격자이자 예수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한 사람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언급한 이유에 대해서 저는 오랫동안 궁금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피정지도를 하며 면담을 하거나, 기도의 열매를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건 여성들이 예수님에 대한 묵상 혹은 관상을 할 때, 남성보다 정서적으로 좀 더 깊은 공감과 애정을 갖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일부 남성들도 정서적 공감이 높지만, 많은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마음보다도 머리로 이해하는 경향이 더 한 것 같았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남성들의 하느님이 구약의 하느님이라면, 여성들의 하느님은 신약의 하느님인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독특한 특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신에 대한 경외감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신을 만나는 열쇠,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영원한 벌에 대한 공포심과 양심의 가책은 종교를 믿게 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은 두려움, 경외감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이 사랑을 느낍니다. 그 사랑이란 바로 임에 대한 사랑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나는 장면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우리 신앙의 정수인 사랑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살피러 무덤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열려있고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고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모했던 마리아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와서 말을 해도, 심지어 예수께서 와서 말을 건네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자신의 애통한 심정을 호소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시자 그제야 그녀는 그 분이 예수님인지 알게 돼서 라뽀니(선생님)”하고 반갑게 대답했습니다.

마리아야!”라는 부르심과 라뽀니라는 대답은 아마도 예수님과 마리아 간에 평소에 늘 주고받던 호칭이었으며, 그 속엔 사랑의 감정이 담긴 소통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앞에 오고 간 말 속에선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가 가장 원초적인 이 마리아야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에 단박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감사성찬례 예문에도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는 구절이 있듯이, 주님을 아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닌 마리아야라는 한마디에 알아차리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가 이 경지에 단숨에 도달한 것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고, 그 분을 따라다니며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동을 곁에서 보고, 배우고 하는 숙성의 기간이 있었기에 마리아야라는 한 마디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간절히 찾은 마리아의 심정처럼 우리도 간절함, 그 절절한 사랑을 갈망합시다. 주님이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고 기뻐할 수 있는 그 은총을 간구합니다. 예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고 찬양함을 넘어 사랑하고 연모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부활절! 예수님 당신을 그리워하며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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